1월 24일(금) 한 구절 묵상
여호수아 15장 63절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여호수아 15장 63절
불안한 하나
유다지파의 땅은 120여개의 성읍들을 아우르는 넓은 영토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유다지파가 받은 땅의 경계를 상세하게 그려내는데,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 꼬리표가 하나 붙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게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63). 여부스 족속을 내몰지 못했다는 이 한 구절이 앞의 120개 성읍을 다 받았다는 기분 좋은 설명을 전부 상쇄시켜 버립니다.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하나가 유다의 약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춰진 은혜, 선악과>의 저자 김민정 목사는 선악과에 대한 궁금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 그렇게 위험천만한 거라면 아예 만들지 마시지, 왜 만드시고 또 선택권을 주셔서 말썽인 걸까?" 이런 궁금증은 아마도 거의 모든 교인이 한 번 쯤은 해봄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을 감안할 때,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을 것을 하나님이 모르셨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선악과를 선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것일까요?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오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 하나로 ,사랑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지적합니다. 사랑은 다 해주는 것일까요? 잘못된 것이라도 다 해주는 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막아야 하고 절대 허용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생깁니다. 이는 사랑의 배타성입니다. 이런 오해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발전하고 선악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오해를 풀어내기 위해서 저자는 모든 것을 받은 아담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지를 질문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다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분인데 도대체 아담이 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과 선택입니다. 아무 것도 드릴 수 없는 아담의 현실에서 사랑이란 선악과에 대한 사랑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아담 스스로 자제함으로,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노력함을 표현할 수 있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 설명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를 지켜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땅을 분배 받은 유다는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120개 성읍 중 예루살렘에 대한 이 한 구절이 불안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으나 이 하나가 결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여호수아가 예루살렘 왕을 죽였는데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 설명이 우리 신앙의 안일함을 꼬집는 듯 합니다. 해결하지 못한 그 하나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야 합니다.
불안한 것은 빨리 해결해 버리는 게 지혜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하나, 바로 그것을 사랑의 배타성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옳지 않은 것이라면 해결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완전무결할 수는 없겠지만, 느슨하게 놔두는 것과 피 흘리도록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얍삽한 계산과 타협일 뿐입니다. 하여 계산과 타협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