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목) 한 구절 묵상
예레미야 48장 11절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48장 11절
복음의 필요성
예레미야를 통해서 선언되는 열방의 심판 중 모압은 꽤나 긴 분량을 차지합니다. 48장은 전체가 모압에 대한 심판의 말씀인데, 그들이 심판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과도한 자기 확신입니다.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11). 이 표현은 모압이 외세에 유린되거나 포로가 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능한 전사로 표현합니다(14). 아픔을 모르는 모압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이제 그들이 자비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조롱했던 그 조롱이 모압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의 저자 윌리엄 윌리몬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부족한 것이 많아야 하는 것처럼 편향된 것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아프고 병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인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복음을 찾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여전히 복음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복음에 대한 접근 방법이 전통적으로는 인생의 문제-복음의 필요성으로 전개되지만, 오히려 반대로 복음의 절대성-인생의 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의 메시지는 가학적인 죄인 설정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도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깨닫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족함 없는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주어진 것이며, 가진 것으로 희생과 섬김을 책임져야 하는 사명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과 종교, 신앙과 세상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종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세상도 비슷합니다. 성공은 나 자신의 완성이며 나 자신을 위한 길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복음은 이와 다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 존재하며 나의 가진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너를 살리는 생명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복음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죄란 철저하고 야비한 자기 중심성, 자기 만족과 자기 보호의 모든 행태라 하겠습니다. 모압처럼 말입니다. 골방의 선지자, 변방의 작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열방에 불길을 토하게 하실 때,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던 모압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땅을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차하게 손 벌린 적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풍족했기 때문입니다. 옮겨지지 않은 술이 그 깊은 맛을 유지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깊은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모든 것이 죄였음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들인 모압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은 이스라엘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돕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롱했고 오랜 적대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즐거워했습니다. 이제 그 조롱이 모압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스스로 괜찮다 여긴 삶에 소돔의 불덩이가 떨어질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인생, 자아로 충만한 인생에게 죄의 심판이 떨어질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세상에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적당히 괜찮을 때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당히 넉넉할 때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살펴 내 주변의 작은 자, 주의 형상으로 보내주시는 이들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이 사명을 깨닫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게 주신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