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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 묵상

정확한 사랑의 실현

 

6월 28일(금) 한 구절 묵상


열왕기하 4장 43절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4장 43절

정확한 사랑의 실현

열왕기하 4장의 나머지는 기근 때에 나타난 기적 담화입니다. 두 개의 기적이 나오는데, 독풀을 먹었던 선지자 훈련생들을 낫게 한 것과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여 명을 먹인 사건입니다. 이중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와 매우 비슷합니다.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43).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풍성한 은혜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저성장 시대에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 중 하나는 소소한 욕망의 충족에 매우 민감하게 몰두한다는 점입니다. 큰 꿈이나 야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작은 만족이라도 누리고자 하는데, 이를 소확행이라며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칫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일상으로 변질 될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의 소비 문화만 보더라도 이런 현상은 뚜렷하게 증가하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버거움을 보상 받고자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일들을 반복하게 되면 오히려 마음은 더 메마르고 맙니다. 심각하게는 중독 증상까지 나타날 위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소비적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작은 것이라도 더 누리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니라고 부추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필요하겠습니다만, 본질적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현실에 대해 본질적인 해결을 제시합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쾌락, 그런 자기 중심적 만족이 아니라 정확한 사랑의 실현입니다. 신형철 작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를 인식하는 사랑이고, 타인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확인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결여/결핍을 확인하면서 인생을 깨달아가는 것이 사랑의 실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해로 볼 때 성도는 사랑 받은 존재로서 사랑을 실현해 가면서 자신을 깨달아 갑니다. 복음은 논리와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현으로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나만 먹기도 부족한 때에 어느 한 사람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를 내어드렸고, 이것을 받은 선지자는 자기가 먹고 자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다시 제자들에게 내어줍니다. 젊은 사환은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겠나고 묻는데, 이런 질문의 내면에는 나 먹고 살기에도 모자라다는 자기 중심성이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지자의 대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43). 무명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선지자에게로 이어졌고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결실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확한 사랑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기근이라는 결핍과 메마름을 풍성함으로 채웠습니다. 사랑이 채운 것입니다. 이 사랑이 나와 너를 채웁니다. 이 사랑이 풍성함의 열쇠입니다.

사랑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오늘을 달라지게 하며 인생을 변화시키는 KEY입니다. 이것을 미뤄두고  시도하는 다른 것들은 그저 소비하고 소모적인 것들이 될 뿐입니다. 이러면 메마름이 반복되고 끝내 지치고 맙니다. 사랑을 실현하는 신비는 내어주면서도 마르지 않는 기쁨으로 확증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보상이나 갚음이 아닙니다. 흐르게 하는 것이고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흐르게 하십시오. 사랑을 실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