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너도 용 될래?

[너도 용 될래?]

개천용. 개천에서 용난다는 우리 옛 말이 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겠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과연 "지금은", 또한 "앞으로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이 옛 말의 현실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정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 시대는 용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이무기의 현실을 짊어 지고 점점 더 스스로에게 희망고문을 하며 살아하는 것은 아닐까..

정확하게 어제-2015. 3. 26-였다. 메일을 정리하다가 신문사 만평 한 컷을 보고는 잠시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분이 나빠 금새 지워버려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다만,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출발선이 같다"는 하단 문장과 그 위에 그어진 출발선에, 한 청년은 리어카에 노부모를 태우고는 힘겹게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부모님이 타고 있는 외제 승용차, 그 위에서 방방 거리며 출발을 기다리는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둘 다, 같은 출발선이었다. 동일한 선(線) 상이었건만, 결과는 왜 그리도 뻔해 보이던지. 아마도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개천용은 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세상이 그 속의 모양새를 그렇게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개천용은 커녕, 이제는 이무기도 못 되는 현실, 아니, 이무기가 된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현실을 맞이해야 할 판이다.

 

요즘 정치 판에서는 저 남쪽 지방의 자치단체 장이라는 "홍씨"가 의무급식을 폐지해서 난리가 났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낙선 한 후,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치더니, 자리를 옮겨 경상남도 도지사가 되셨더란다.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통하는 홍씨는 많은 기자들 앞에서 "어렸을 때 밥도 못 먹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수돗물이라도 먹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검사가 되었고, 도지사가 되었"다고 열변했단다. 그러면서 자신을 용처럼 생각했을 테지.. "학교에는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공부하러 가는 것"이라면서, 내심 용 된 자신을 본 받으라고 한 말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 가난하게 살아서, 그 가난이 억울해서 열심히 했다는 것. 그것이 좋은 성과를 얻어 검사가 되고, 여당의 대표 직함도 얻어보고, 자치단체장을 하게 된 것,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 사람이, 이제는 개천에서 용 되기에 좀 더 수월하게, 모두에게 그 기회를 주겠다는 국민의 의사를 무참히 잘라버리고 기회를 막아버렸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날 그 분이 드신 점심식사비는 무려 2만 5천원이었다지? 용된 그 분에게 아마도 그 점심값은 참 저렴했을 것이다. 으리으리한 용왕궁에서 남들이 비벼대며 차려준 초호화 밥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저렴했을 것이다.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비판이 아니라, 지금 그 분의 꼬라지가 용이 아니라 "욕"스럽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개천용의 허상을 스스로  보여준 모범스승-반면교사랄까..

 

팟캐스트 중에 내가 자주 즐겨 듣는 공익(?) 방송이 하나 있다. <신날새-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신날새라는 해금 연주자가 양서를 선정해서 글을 읽어주고, 청취자들의  후원으로 청각장애인들에게 보청기를 지원하는, 정말 "공익방송"이다. 취지도 좋지만 내가 정말 즐겨듣는 이유는 "양서"를 핵심만 간략하게 전달한다는 데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삶의 촉수를 간지럽히는 알짜방송이다. (궁금하면 들어보라) 몇 주 전 방송에서는 "고병권 작가" 의 저서 <철학자와 하녀>의 한 대목을 낭독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철학자와 하녀>에서 저자는 삶을 일깨우는 한 문장, 또는 단어들을 소개하는데, "노예"라는 말도 그런 말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노예란, 저 자신이 옳고그름을 따져 볼 능력이 없는 존재이거나 그런 것에 무관심한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노예는 습관에 의탁하고, 언론에 의탁하고 , 권력자에게 의탁하고, 다수에 의탁한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너도 용 될래..?

내가 묻는 이 질문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며, 동시에 그대에게 하는 말이다. 개천용. 이 담론 안에는 왜 용이 되어야 하는지는 없다. 그저 용이 되는 것이 꽤나 옳은 것 마냥 툭 던져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말과 의도를 스스로 따져보지 않는 이, 그러면서 용이 되려고 하는 이, 나아가 용 된 것을 부러워만 하는 이, 따져보지 않고 그것에 지향을 두는 이는 -고병권 작가에 의하면, 그리고 내 생각에도- 모두 "노예"다. 그렇게 되어야 좋다고 하니 따져보지도 않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것. 이것의 뒷모습은 노예의 근성이다.

 

너도 용 될래..?

속도전의 신자유주의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용이 되지 못해 안달이다. 그래서 서로를 물고 뜯는 무한경쟁을 하고, 그 속에서 물고 뜯으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용은 커녕 도롱"용"(뇽)도 되지 못한 채, 하늘 쳐다보며, 부모 쳐다보며 원망을 삼킨다. 그대에게 묻고 싶다. 나에게도 묻는다. "너도 용 될래?"

왜. 도대체 왜?

 

요즘 나는 내가 용의 새끼라는 오만한 "속임수-틀"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쓰는 중이다. 내 삶의 특성상,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내 속사정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그럴싸한 말들을 해야 하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둘러싸여 산다. 내 스스로의 시각이 아닌, 타자의 시선과  평가로 인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용트림을 하며 산다. 꼭 용이 될 것 마냥. 아니 이미 용인 것처럼. 그리도 교만하고 오만하게.

무척이나 애쓰지 않으면 이 굴레는 벗어날 수가 없다. 스스로 치고, 또 쳐서 발끝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도롱뇽도 되지 못한 것이 용인듯 착각하며 살다가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쓴 눈물을 삼켜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더. 나를 깨뜨리고 쳐야 한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삶의 정황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길이고 십자가의 도라 하겠다.

 

개천용. 너도 용 될래..?

내가 무척 좋아하는 박노해 시인의 <경주마>라는 시를 읊어주고 싶다.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010, 느린걸음) 중.

 

<경주마>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그대에게도 묻고 싶다.

너도 용 될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하게 용되려 하기 보다, 지금 주어진 일상에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용이라 생각하는 홍씨가 우리의 모범이 아니다. 스카이 대학에 가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네 삶의 정답은 아니다. 때깔나는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이 너와 내가 바라보야 할 지향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려하면 망한다. 그러니 세상이 요구하는 용이 되려 하지 말고 너는 너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 어느 특별한 날들을 바라지 말고, 바로 오늘을 특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해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삼포, 오포.. 그런 말들에 주눅들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자는 말이다. 효과 안 나는 변명같은 최선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 삶에 파장이 일어나고 변화가 나타나는 진짜 최선을 살자는 말이다. 네가 너다워지고, 내가 나다워질 때, 그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고 가장 옳은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을 통해 불합리한 용의 세상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다수가 모여 용의 성, 용궁을 헐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용 되려 하기 보다, 특별한 보상이나 특별한 어느 때를 선망하기 보다, 지금 내 하루를 최선으로, 감사로 살기로 날마다 다짐해 본다. 날마다 내 자리를 겸손하게 유지하고, 날마다 나의 몫에 열정과 헌신을 다 하며, 너와 연결된 모든 삶의 고리들에 진심의 희생과 섬김을 다 한다면.. 나는 우리 주변이 변화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숨결이고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기대하고, 작은 파장이 일어나는 네 삶의 자리를 기대한다. 거창한 용, 황금 비늘의 번쩍거림이 아닌, 지금 이 봄, 개나리처럼 소박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존재만으로도 선물이 되는, 그런 너와 나를 기대한다. 언제 봄이 오느냐고 투덜대던 날들이 어느 새인가 봄이 되듯이, 우리의 옳은 하루가 켜켜이 쌓여 너라는 꽃, 나라는 꽃이 참 어울리게 피어나리라 믿는다.

이 봄에. 이 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