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38절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사랑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20260904
룻다에 살던 여제자 다비다가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그곳의 제자들은 가까이에 있던 베드로를 불러 청합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여 자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38). 죽음 앞에서, 다 멈춰버린 상황에서도 사랑은 움직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증명됩니다.
<관계>의 저자 김일환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조국 교회에서 경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훈련시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다양해도, 방법은 화려해도, 대부분 마음의 훈련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 기도, 독서, 예배, 봉사와 전도의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의 훈련을 제시합니다. 이름은 달라도, 방법은 차이가 있어도, 결국 이 다섯 가지 훈련에 대한 내용은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자주 강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분명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하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게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훈련시키실 때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밖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강조하면서 가르치는 일들이 대부분 실제로는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들 뿐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말하지만 혐오를 행동합니다. 용서를 말하면서 정죄를 행동합니다. 희생을 말하지만 십자가의 태도와 선택을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모조리 그러는 건 아닐 테지만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단지 교회를 열심히 가고 교회 의자에 잘 앉아 있는 것으로 신앙을 기준화 합니다. 십자가 사랑이 이벤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쓰라린 현실입니다. 사랑은 본래 관게적입니다. 이 말은 대상이 있다는 뜻이고, 대상을 향한 행동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은 아래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다비다의 죽음에서도 사랑은 움직입니다. 그녀의 사랑을 받았던 이들,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은 죽음에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해서 움직입니다.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식에 그들은 룻다로 달려갑니다. 어서 오라고, 와야 한다고 사랑으로 부릅니다. 멈출 수 없는 이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나를 향한 사랑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멈출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랑하셔서 찾아오시고 찾아내시며,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랑을 받은 나는, 교회는 이런 사랑으로 삽니다. 교회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에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랑의 행동, 사랑의 수고입니다.
내 사랑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움직이고 행동해서 내게로 부어졌다면, 내 사랑도 어딘가로는 움직이고 행동해서 부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주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건 어쩌면 그럴싸해 보이는 립서비스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움직여야 합니다. 이미 주신 사랑이 충분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이미 완전합니다. 그러니 내가 움직여야 합니다. 사랑이 흐르도록, 사랑이 성취되도록 내가 쓰임 받아야 합니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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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다비다의 죽음에 공동체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 내가 움직어야 할 사랑은 누구이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사소하면서도 소중한 일들을 적용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