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정말 그래야 합니까

목사wannabe 2026. 7. 28. 07:39

사도행전 9장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정말 그래야 합니까

20260728

 

아나니아에게 이해되지 않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11). 사울이라니요. 그를 만나면 잡혀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울을 만나라 하시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모든 종교가 기도의 행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 특별한 신탁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인신제사를 하거나 자해와 신전매춘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나 이단 같은 곳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신탁 행위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의 기도와 우리 신앙의 기도는 같을까요?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이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도 헛된 외침에 불과해지고 맙니다. 타 종교의 기도는 기복, 그러니까 내가 받아야 할 어떤 답에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소원, 문제해결, 병고침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와 다른 기독교 신앙의 기도는 내가 받아야 할 것 이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기도라는 말에 담긴 본래의 뜻이 이것입니다. 해서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나의 뜻이 우선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물론 우리도 문제해결과 병고침, 소원을 두고 기도합니다만, 언제나 결론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일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순종 뿐입니다. 해서 성경이 보여주는 기도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성도를 순종의 삶으로 빚어가십니다. 사울도, 아나니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환상으로 임하셔서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이 사흘 간 했던 일은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 중에 그를 이전의 삶에서 돌이켜 새롭게 빚어가고 계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아나니아입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으라는 말씀은 날벼락입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기독교인을 체포해 종교재판에 넘기던 악명 높은 유대주의자 아닙니까. 그에게 가라는 말씀은 죽음을 담보해야 하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늘의 뜻으로 우리를 빚어가시는데, 어떤 때에는 어처구니 없는 마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상황이 정말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도 다 보여줍니다. 아나니아는 순종합니다. 그가 고민이 안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신실한 아나니아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니 불안과 고민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전제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분별의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정말 그래야 하는지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순종을 전제로 분별을 구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고백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할 것과 하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권세가 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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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2. 순종을 전제로 분별을 구해야 할 일은 어떤 것입니까? 정말 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