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은혜의 구경꾼이 되지 말 것
20260721
사울의 다메섹 체험에 대한 흐름에서 사도행전 저자의 상황 해설이 이렇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7). 소리만 들었다는 것과 보지 못했다, 말을 못하고 서 있다, 는 이 연속적인 상황 설명은 체험적 사울과 방관적 주변인을 구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같은 사건 속에서 누군가는 붙들렸고, 누군가는 구경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어 표현에서 '듣다'는 말은 Hearing 과 Listening 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후자는 의미와 의도를 해석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들음입니다. 한문에서도 들을 문(聞)과 들을 청(聽)으로 '듣다'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굳이 우리 말로 구분해 보자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여도 정말 다른 의미입니다. 소음이 단지 소리를 넘어 정보와 환경 전반을 아우른다고 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들리는 것들 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하는 맥락적 듣기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고, 삶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내면적 듣기는 새로운 삶으로의 변혁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무리에게서 이런 차이가 일어났습니다. 살기등등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던 사울의 무리에게 환한 빛이 임하고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만 그것을 체감했고 그 주변의 무리는 얼떨떨하게 멈춰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상황 설명은 사울만 빛을 보았다고 하면서 무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냥 멈춰버렸다고만 전합니다. 이는 의도적인 구분입니다. 같은 사건을 겪었는데도 사울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같이 가던 무리들은 무슨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의미가 되지도 않았고 해서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고꾸라진 사울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을 뿐입니다. 그 결과, 사울은 인생이 완전히 새로워졌는데 반해 무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에 머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지금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시간, 같은 순서로 예배했는데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반면, 어떤 이는 무의미하게 지나갑니다. 시간의 소비 또는 종교적 의무, 그 정도에 머물 뿐입니다. 해서 되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의미 없는 다수입니까, 아니면 나를 향한 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반응합니까? 오늘은 어떻습니까? 시간이 흐르는 오늘입니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순종을 고민하며 은혜 속에 빚어지는 오늘입니까? 같은 24시간, 같은 시대를 살아도 완전히 다른 이 차이 속에서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은혜의 구경꾼이 되기 쉬운 현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군중 속에 적당히 숨고자 합니다. 구약의 사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집요하게 추격하시고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믿음의 책임, 믿음의 반응은 나도 적극적으로 순종을 찾고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은혜의 일하심에 푹 잠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태여서 반드시 움직임을 동반합니다. 나에게 주신 사랑, 나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분명하다면, 적당히 주변에 머물지 말고 은혜의 한복판에서 순종을 이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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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같은 사건 속에서 사울과 일행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2. 나를 움직이게 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은 오늘, 구체적인 어떤 순종과 실천으로 성취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