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기다리는 것이 전부일 때
20260720
환한 빛 속에서 고꾸라진 사울에게 연이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왜 예수님은 시내로 가라고 하신 걸까요? 바로 사명을 주시고 바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신앙의 필연적인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다림이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님이라면 누구나 겪어서 아는 현실이 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가치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자녀는 기다려주는 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가르침도 잔소리가 될 뿐이고, 비교와 원망, 불평이 온 삶을 휘감아 버립니다. 삶이 휘청거릴 때 해 줄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울타리가 되는 것과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기다려준 부모가 있어 자녀들은 흔들림 속에서 강해지고, 돌아올 곳이 있어 방황하다가도 방향을 찾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삶은 온통 기다림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기다림의 장면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후 십 년이 넘도록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렸고, 그 아들은 낯선 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모세의 삶은 기다림 자체였습니다. 무려 120년의 삶이 온통 기다림입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기의 시간도 그렇고,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마라나타' 고백했던 증인들의 삶이 기다림 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서 기다림은 신앙생활의 현실태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여정에도 이 기다림이 나타납니다. 환한 빛이 덮쳐 고꾸라진 사울에게 예수님은 시내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설명도 없이 예수님은 시내로 가서 뭘 해야 할지 알려줄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결정적인 그 장면에서 사명을 말씀하셨다면 더 확실하지 않았을까요? 이방인의 사도로 확실한 증표를 주시고 계획을 주셨다면 완벽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주님은 기다리게 하십니다. 기다림 속에서 머물게 하십니다. 사명을 확증해 줄 '어떤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길을 깨닫는 건, 이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알아야 할 하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해서 기다림은 피하는 것이 아닌, 온 삶으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것은 가볍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쉬이 날아가 버립니다. 빠름의 세상에서 신앙의 온전한 여정은 기다림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장 무엇이 된다고, 혹은 되지 않는다고 일희일비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진득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기다림은 희망이며 오늘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어 보이는, 어떤 무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다림으로 나를 빚고 계십니다. 어떤 누군가를, 또는 어떤 상황과 사건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치지 말고 오늘도 복음으로 살며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림이 전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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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예수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 오늘도 기다림이라면, 이 기다림을 견디게 할 오늘의 사랑, 오늘의 소망은 어떤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