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 33절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손해 보지 않는 사람들
20260702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가르쳐 준 성경의 내용은 고난 받는 메시아였습니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33). 고난 받는 사람에 대한 이사야의 글은 의미가 어렵습니다. 고난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한 복음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불의는 참을 수 있지만,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말을 아십니까? 짧은 한 문장이지만 현대 한국 사회의 가치를 단편적으로 드러낸 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핍박과 압제, 온 나라가 뒤집히는 전쟁을 숱하게 겪은 우리 나라는,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본능이 어떤 진리처럼 강화되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처럼, 지금은 머리를 굽혀도 일단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죄인의 본성이 그러하듯, 어떤 타협 후에 나타나는 변질, 그러니까 본래의 뜻을 잊어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결국 타협이 타협을 낳고, 적당한 이득을 취하면서 서서히 변질되어 갑니다. 삶의 기준이 이득으로 옮겨갑니다. 대의 보다 나의 이득이 앞서고,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죄악이 됩니다. 결국 불의는 참아 넘어가지만, 내 손해와 불이익에는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교회는 달랐을까요?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도둑질을 품어준 미리엘 주교 같은 사람은 정말 소설에서나 나오는 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손해 보지 않는 게 똑똑함이겠지만, 기독교 신앙과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우리 신앙은 복음 안에서 기꺼이 손해 보는 것을 사랑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선지자의 말을 해설해 줍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원자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고난이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억울한 상황이라고 여겼습니다. 구원자는 다윗처럼 제국들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영광스러운 영웅이지, 고난 받고 버림 받는 구원자라는 개념은 아예 성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립은 이런 전통적인 이해를 넘어 고난 받는 메시아로써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설명합니다. 후손도 없이, 모두를 사랑했으나 모두에게서 버림 받아 죽음에 내몰린 그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털 끝 만큼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너무 다른 예수님이 지금 나를 바라보신다면 무어라 하실까요?
예수를 따르는 믿음이라면,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내어주고, 사랑으로 채워주는 일은 당연해야 합니다. 물론 이용 당하거나 사기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을 완성하기에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복음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겠습니다만, 너의 생명을 위해서, 너를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서 기꺼이 사랑의 손해, 사랑의 수고를 짊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런 한 사람을 통해 십자가는 오늘도 실제가 되리라 믿습니다.
--
말씀질문
1. 이사야가 언급하는 고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2. 사랑으로 인해 기꺼이 내어주고 손해를 봐야 하는 오늘의 일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떻게 기도하며 실천할 것인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