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기
20260408
이스라엘 조상들의 배반을 짚어가는 스데반은 아론의 송아지를 언급합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40).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40여 일을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을 들썩거립니다. 그 결과가 아론의 송아지였습니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면 아론의 송아지가 되고 맙니다.
삶의 많은 것들은 기다림으로 완성됩니다. 인스턴트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 시대는 클릭과 반응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가히 "딸깍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손 안의 작은 화면이 조금이라도 느리거나 로딩이 길어지면 못 견딥니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학원 한 달 다닌다고 해서 바로 성적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투자를 했다면 이익을 회수하기까지 사업의 과정이 당연하게 필요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은 기다림을 지나서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딱 그 만큼의 가벼움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이 그렇게 가벼워진 것은 아닐까, 고민이 많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없어졌다는 건 정말 위급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세였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자, 그 말씀을 전해주고 중재하며 바로에게 열 재장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게 한 사람이 모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후 도대체 소식이 없습니다. 불안해 진 이스라엘은 아론을 닥달해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속내는 이렇습니다. 물론 메마른 광야의 현실에서 그들의 불안을 다 헤아려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성경이 또한 스데반이 의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기를 위한 신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광야에서나 로마시대에나, 그리고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가짜는 이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기꺼이 돌을 들고, 협박하며, 아우성을 칩니다. 세상이든 신앙이든, 하나님 앞에서 진짜가 되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진짜 고난은 바깥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 속의 상태입니다. 들끓는 아우성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또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길이 ㅣ이렇습니다.
모세는 40년. 요셉은 약 13~15년. 아브라함도 15년. 다윗도 약 10~15년을 사울을 피해 도망다녔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까지도 3일이라는 죽음의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모두 기다림을 통과한 일들입니다. 그러니 기다림은 특별하다기보다는 당연해 보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고 오늘이라는 시간도 기다림의 완성 안에서 빚어가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은 오고 결국 해는 뜹니다. 바르게 기다리면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뜻을 완성하십니다. 부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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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출애굽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한 신을 요구했습니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2. 내가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