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쉼의 은

목사wannabe 2026. 3. 25. 00:30

사순절 30 출애굽기 15장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쉼의 은혜

20260324

마라의 쓰디쓴 마음을 하나님은 만지시고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쓴 것이 달게 변한 후에 만난 자리가 엘림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27). 엘림은 안식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엘림이 목적지는 아닙니다.



마라 다음이 엘림이라는 흐름은 의미심장합니다. 마라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파 쓴 물을 고치시고 검고 쓴 마음을 고치셨습니다. 그 다음이 엘림인데, 엘림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마라로 알려진 와디 하와라에서 도보로 두세 시간가량 떨어진 곳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거기가 어디이든, 출애굽기의 설명처럼 엘림은 물과 나무가 풍성한 오아시스였을 것입니다. 메마른 길목의 소중한 쉼터입니다. 엘림이라는 말의 뜻은 큰 나무들인데, 광야에서 엘림이라 부를 정도라면 제법 규모가 있는 오아시스로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샘 열둘, 종려나무 일흔 그루라고 했으니, 그 당시에는 대규모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숫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열두 샘은 열두 지파를, 일흔 그루의 나무는 이스라엘의 70 장로를 비유하는데, 이들의 안식처가 된 곳이 바로 엘림입니다. 출애굽 공동체 전부가 쉴 수 있었던 넉넉한 쉼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꿀 같은 휴식이었을까요? 아이들은 물에서 신나게 놀고 가축들은 평온하게 거닐었을까요? 하지만 엘림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거기는 머무르고 안주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은 눌러앉으라는 게 아닙니다. 쉬고 회복하고 일어나 다시 광야 같은 사명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참된 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쉼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누려야 하겠습니다. 쉼에 붙들리거나 쉼에 집착한다면, 그게 애굽과 무슨 차이이겠습니까? 오히려 쉼의 은혜가 죄와 타협하는 타락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라도 지나고 엘림도 지나갑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분명하지만 아직입니다. 십자가라는 최종 목적지에 이르러서 사랑하는 내 주님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까지, 또 하루, 또 한 걸음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지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도움 안 되는 말들이 도움인 것처럼 쏟아져 짓누르기도 합니다. 광야라는 거친 환경이 버겁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쉼을 주십니다. 잘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쉼을 동경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쉼이 목적인 것처럼 여기면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변화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내게 주신 자리는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려면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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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질문
1. 하나님이 마라를 지나 엘림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엘림을 누리는 것과 엘림을 동경하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나는 어떻게 엘림을 누리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