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29 출애굽기 15장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마음이 전부
20260323
수르 광야를 가로질러 사흘만에 샘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물은 원망의 물이 되고 말았는데,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3). 홍해는 잊어버리고 쓴 물 앞에서 원망을 늘어놓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물보다 마음이 더 쓰디쓴 것 같습니다.
먹을 물이 떨어졌을 때, 애굽에서는 맑은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거기는 나일의 풍요로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고되고 버거웠지만, 적어도 먹고 살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달랐습니다. 먹을 물이 떨어지면 구할 수가 없었고, 해서 생사의 위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 발견한 샘물입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쓴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상상해 보면, 비록 쓴 물이지만 거기에 샘이 있다는 것은 광야를 지나는 유목민들, 국경을 넘는 상인들, 혹은 이주민들에게는 요긴한 식수로 쓰였을 것입니다. 쓰기는 해도 물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을 테니까요. 졍말 못 먹을 물이었다면, 해서 사람이 오지 않았다면 샘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그럭저럭 감내하면서 먹었던 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풍요의 땅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에게는 아닙니다. 그들은 맑은 물과 포도주가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세계에 익숙했고 그런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해서 그들에게는 쓴 물은 먹을 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물이 누군가에게는 쓴 물입니다. 이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결국 그들은 그 물과 샘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단순히 맛이 쓰다는 미각적 표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광야 길을 견디기 어려운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스라엘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말이 ‘마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원망의 언어를 쏟아냅니다. 마주한 현실을 쓰디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기대했던 구원은 이런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불편해하시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 안에 남아있던 애굽의 독기, 비교와 불신의 잔재, 물질 중심적 계산을 광야에서 드러내시고 은혜와 순종으로 반복해서 다시 빚으십니다. 따라서 광야는 고통의 절규가 아니라, 구원의 자유로 기꺼이 받아내야 할 순종의 자리입니다.
출애굽은 곧 광야의 시작입니다. 애굽의 세상과 비교하면 구원받은 광야의 길은 불편하고 부당하며 늘 부족한 것 투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마라가 됩니다. 쓴 마음으로 쓰라린 말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만지시고 고치십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원망 속에서도 믿음의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비록 광야라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하나님 사랑 안에서 광야를 걷는 우리의 마음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만지고 고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라 같은 쓴 마음이 맑은 생수로 되기까지, 마음이 전부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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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질문
1. 출애굽기 15장 23절에서 쓰다는 뜻의 ‘마라’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2. 하나님은 내 마음을 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만지신다면 어떤 부분을 고쳐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