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하나님 없는 질서

목사wannabe 2026. 2. 19. 03:26
 

[사순절 40일 묵상 : 출애굽의 길] 02_이사야 19장 1절

애굽에 관한 경보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하나님 없는 질서

20260219

 
 

고대 문명 발생지인 이집트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풍요와 질서를 보장하는 정교한 종교 체계를 세워갔습니다. 그 안에서는 잘 짜여진 질서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안정감에  반론을 제기하시고 경고하십니다. "애굽에 관한 경보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1). 세상의 질서와 그들의 안정감에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고대의 신 개념은 지역성을 가진 다신(多神) 사상입니다. 우리 민속에도 부엌을 지키는 부뚜막신이 있고, 산을 지키는 산신령, 생명을 인도하는 삼신할미 등 익숙한 다신 개념이 있듯이, 고대 근동에도 그 지역을 관장하는 신과 역할에 따라 다르게 불렸던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다신개념을 자연과 연계해 하나의 정교한 신학적 질서로 탄탄하게 세워간 곳에 이집트 문명입니다. 나일강의 규칙적인 범람과 그것을 바탕으로한 질서, 그 결과로 얻는 풍요를 이집트 사람들은 세계관으로 정립해 갔습니다. 파라오는 이 모든 질서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신적 통치를 이루어가는 신의 대리자, 나아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런 신학 체계를 바탕으로 이집트 문명은 신앙과 일상을 하나로 꿰어 생명의 탄생과 삶의 여정, 그리고 죽음과 내세까지, 인생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를 나일강의 풍요로 제시한 풍요의 신학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신학이 주는 풍요와 안정을 '마아트'(ma'at)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윤리/도덕적 가치를 넘어, 그 안에서 잘 살다 죽는 것이 가장 좋다는, 지극히 현세적인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이런 풍요의 신학에 대한 도전이자, 탈출입니다. 이집트 문명의 신학이 무지하거나 무질서한 우상으로 득실거려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그 정교한 질서 체계가 풍요를 수단으로 거짓된 안정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질서는 아무리 풍요하고 잘 산다 하더라도, 허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혼돈이라 부르셨습니다. 출애굽 신앙은 이러한 허상과 혼돈을 깨닫고 과감히 광야를 택하는 거룩한 도전이며 탈출입니다. 그 허상들은 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여호와 앞에 떨며 힘을 잃고, 녹아지듯 무너질 것입니다(1).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가 당장의 풍요를 내세운다 해도, 결국 심판받아 무너질 거짓이라는 것을 출애굽의 열 재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고통과 무질서로 출애굽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평안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 할 생명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출애굽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메말랐으나 먹여주시는 참된 풍요와 생명의 현장이며, 갈 길을 모르나 가야 할 만큼을 걷게 하시는 섭리의 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없는 질서와 그것이 주는 당장의 풍요와 안정을 분별하고 떠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풍요와 하나님의 광야, 이 둘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없는 질서, 하나님 없는 풍요 앞에서 거룩한 출애굽을 선택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애굽은 떨며 녹아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출애굽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출애굽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