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 13절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낯선 곳에서의 구원
20260115
대흉년으로 인해 야곱은 요셉과 재회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개인적인 기쁨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애굽이었습니다.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13).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경험하는 이들의 삶을 스데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로 설명합니다. 애굽이어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세속화를 드러내는 말 중에 하나가 '형통'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요셉을 설명할 때 종종 표현하는 단어인데, 히브리어로는 '찰라흐'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돌진하다, 뚫고 나아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제가 생기고 역경을 겪으면서도 뚫어가는 삶의 모양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건, 성경이 요셉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이 말의 주어가 요셉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셉이 잘해서, 요셉이 뛰어나서 형통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 말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아픔 속에서도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고난 중에서도 빛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형통하게 하신 요셉의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형통하게 하셨다는데 노예였고, 형통이라면서 감옥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 개념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형통은 결과나 환경의 좋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거기가 감옥이었어도 요셉은 견디고 뚫어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해서 돌진하고 뚫어내는 힘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견디고 어둠 속에서도 전진하는 형통은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설명하는 야곱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흉년을 겪는 야곱은 살아남기 위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아들들을 보냅니다. 그가 직접 다녀오지 않은 까닭은 비단 나이나 어른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약속의 땅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돌아온 곳인데 함부로 그 땅을 떠나겠습니까? 그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견디고 버티며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이집트로 이끄셨습니다. 그곳은 낯선 땅이며 약속과는 다른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요셉을 키우셨고, 이방 땅에서 야곱과 아들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이런 설명을 통해 의도하는 게 무엇일까요? 그는 성전에 갇혀 버린 하나님이 아닌, 모든 세계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짚어가며 이집트에서도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낯선 곳입니까? 하나님께는 거기도 은혜의 손으로 담아내셨습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 여겨집니까? 견디기 버겁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나를 점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 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낯선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땅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섭리의 환경입니다. 그러니 임마누엘만이 중요합니다. 요셉처럼, 야곱처럼 말입니다. 관건은 환경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은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낯설어도, 맞지 않아도 은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