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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 묵상

순종의 결과가 왜 이래요

 

사도행전 7장 6절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순종의 결과가 왜 이래요

20260108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해 받은 것은 정말 약속의 말씀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도 험난합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6). 몇 번을 읽어도 전혀 소망이 되지 않는 말씀일 뿐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결과라면 받으시겠습니까? 네, 받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미국 교회를 뒤흔들었던 화제의 역작 <바벨탑에 갇힌 복음>은 현대 교회의 병폐인 번영 신학을 고발한 행크 해네그래프의 저작입니다. 벽돌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묵직한 책의 크기와 무게만큼이나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무겁습니다. 저자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면서 소위 '믿는 대로 된다'는 식의 설교는 복음의 진리를 가장  심각하게 왜곡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결국 긍정의 언어/자기확언의 변형일 뿐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은 교묘한 거짓입니다. 믿는 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됩니다. 해서 신자는 '내가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과 성찰, 검증 없이는 믿는 대로 된다 하면서 결국 믿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성전주의와 결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의 교묘한 말장난에 속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왜곡과 변질과 포장의 시도가 있어도 언제나 정확하게 복음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스데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이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6). 우리는 아브라함이 100살에 아들을 얻었다는 것만 부각시킬 뿐, 순종한 그의 삶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지는 잘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는 순종했기에 어려워진 인생입니다. 아브라함은 잘 살던 고향 터전을 떠나야 했고, 갈 바를 모르고 길을 가야 했습니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는데, 모두 순종했기에 나타난 결과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아야지, 그 후손이 나그네가 되고 400년 동안 종살이 한다는 게 축복의 말씀일까요? 이게 하나님의 이끄심인가요? 세속적 기준으로 본다면 이건 망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뜻을 한 번도 꺾지 않으셨고,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그 성취의 결과가 예수를 통해 이루신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순종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하셨다면 영광과 범접할 수 없는 권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핍박 당했고 매 맞았고 수치로 죽임 당하셨습니다. 순종의 결과가 이런 십자가 처형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니 번영 신학이나 세상에서의 잘됨이라는 게 우리의 길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결과는 보상과 대가가 아닙니다. 오직 구원하심 뿐입니다. 구원하심이 세상의 모든 보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고 절대적입니다. 우리 신앙은 오직 이 구원하심만을 향합니다. 이 땅에서의 번영은 어떤 수단들 중 작은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의 순종 뿐이어야 합니다. 잘 됨과 성공은 보상도, 상급도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수 천 가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순종했으니 잘 될 거라는 계산을 과감히 넘어, 순종으로 이루신 십자가 복음을 내 몸과 삶으로 받아내야 하겠습니다.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오늘의 십자가는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따져보는 복된 하루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