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장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너무나 다른 신앙
20251208
분노로 들끓던 재판정이 가말리엘의 발언으로 잠잠해졌습니다. 재판을 진행하던 권력자들과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태형(매질)으로 적당히 마무리하고 풀어줍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들의 반응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 재판 자체도 억울하고 매 맞고 수치를 당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인데, 이들은 기뻐했습니다. 지금의 교회와 너무 다른 신앙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는 이 말씀과 사도들의 태도에서 얼마나 멀어진 걸까요?
존 파이퍼 목사는 <하나님께 굶주린 삶>에서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마귀와 악한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응답이나 은혜라고 말하는 것들이 신앙의 적이라니,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도 이 말과 진단은 처음 교회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그렇습니다. 자본에 물들고 성공신화와 웰빙을 추구하는 현대의 교회에는 존 파이퍼 목사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배척한 당시 유대교의 상황이, 또한 중세 교회가, 근대와 현대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현실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을 무디게 하는 것은 악인들의 잔칫상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적당히 잘 나가고 잘 사는 것을 복이라 여기는 번영과 기복의 종교심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예수 믿어 잘 사는 게 복이라 말하고 있다면 이는 초대 교회와는 너무 다른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억울한 재판정에서 사도들은 웃으며 나왔습니다. 결과가 좋아서인가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 부활의 생명을 전했으나 도리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의 말로 중재가 되긴 했지만 죽을 뻔했습니다. 적당히 매 맞는 것으로 재판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매 맞음도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법 상 '40대에서 한 대 감한 매'를 때렸을 것입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피가 터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 사도들은 기뻐했습니다. 죽지 않아서 기뻤을까요? 성경은 예수 이름으로 인해 받은 능욕이 복음의 증거였기에 기뻐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사도들의 신앙과 우리는 얼마나 다릅니까. 여전히 내 문제 해결과 나의 성공이나 소유를 복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처음 신앙 사람들과는 너무 달라진 겁니다.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던 교회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의 교회와 달라졌다면 이것이 심각한 변질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으로 인해 누리고 싶은 삶의 어떤 조건과 모습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평생 주를 찾아도 주님을 모를 뿐입니다. 주를 믿는다면서도 주님을 모르고 부활도, 소망도 모른다면 그것이 헛됨과 허망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도의 갈망은 복음 뿐입니다. 다른 필요가, 어떤 주님의 선물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그것들이 복음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오늘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 뿐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외양간 송아지가 없어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겠다는 고백이 그립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처음 교회의 신앙과 같아야 합니다. 오늘이 그래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