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죽음에 이르는 병

목사wannabe 2025. 10. 30. 07:12

 

 

사도행전 5장 7절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죽음에 이르는 병

20251030

 
 

아나니아의 장례는 매우 신속하고 처참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고작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장례는 장례라기보다는 처리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죄가 심판으로 처리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삽비라입니다. 그녀는 사건을 알지 못한 채 교회로 왔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7). 이 참담한 순간이 보이십니까? 죄는 이렇습니다. 알지 못하게 나를 삼켜버립니다. 은혜의 공동체는 동시에 죄와 심판, 죽음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삽비라의 결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늘 이렇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유한한 인생에 주어진 무한한 자기 확상의 욕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실존적 절망을 말했습니다. 꿈꾸고 희망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절망합니다. 이 절망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은 절망입니다. 이 절망의 끝은 유한한 삶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절망과 이미 결정된 죽음을 겪으면서도 지금 달라진 삶을 삽니다. 반면 대다수는 이 절망과 죽음으로 괴로워 하며 후회 가득한 날을 삽니다.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적 사고를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합니다. 죽음은 예정되어 있고 나는 유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삶은 그저 죽어가는 날들에 불과할까요? 성경은, 복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죄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의의 생명과 부활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삶이 있다고 초청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절망을 지닌 인간, 즉 죄인이 생명의 부르심에 무지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가 바로 불신, 믿음 없음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자기 욕망과 계산에 함몰된 아나니아는 절망적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몰랐던 그의 아내 삽비라입니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어서 그녀는 남편이 죽은 사건을 몰랐을 것입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7) 알지 못했다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그녀는 정말 하나도 몰랐습니다. 죄의 무지가 이것입니다. 남편이 죽었고 자신도 코앞에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도 몰랐고 심판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몰랐다고 한들 면죄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 죄의 실체입니다. 철학자는 절망을 병이라 했지만, 성도에게 절망은 일종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입니다. 절망을 안고 희망을 살아내는 사람이 있었다면, 죄의 현실을 짊어지고도 은혜의 감격을 누리는 삶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기에, 우리는 죽어가는 오늘이 아니라 살아내는 오늘로, 소망의 오늘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하여 오늘이 죽어가지 않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복음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절망적인 환경과 나아지지 않는 잿빛 날들을 보내더라도 기억하십시오. 모르면 안 됩니다. 죽음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또한 더 큰 생명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이 생명이기를, 죽어가는 날들이 아니라 생기로 가득한 은혜의 날들이기를 빕니다. 생명을 약속 받은 자로, 생명답게 살면 좋겠습니다. 밝게 웃고 서로 격려하며 다독이는 생기 가득한 오늘을 보내십시오. 나를 흔드는 일들이 있더라도 기꺼이 품어주는 넉넉한 오늘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