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

사도행전 4장 24절
간증의 재발견
20250929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공동체로 돌아가 종교재판의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공동체는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영광을 돌리며 찬미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24). 이 나눔을 우리네 말로 바꾸면 간증입니다. 간증은 본래 법정 용어인데,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증언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간증의 목적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방패 간(干)은 다중의 의미를 지닌 한자입니다. 사전에는 방패, 과녁, 막다, 구하다, 범하다 등 5~6가지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때로는 중국 간자체에서 '마를 건'자와 동일한 뜻과 음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건성으로 한다'고 말할 때의 '건'이 바로 干입니다. 하나의 글자로 여러 뜻과 전혀 다른 음까지 담아냈으니 이 한 글자의 품이 정말 넓어 보입니다. 법정 용어로 사용되는 간증은 본래 남의 범죄에 대한 증인이 하는 말을 뜻하지만, 현재는 잘 쓰이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의 신앙 고백을 나타내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간증'이라고 하면 대충 알아 듣습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간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 경험과 삶으로 드러낸다,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해서 간증은 너무 소중하고 정말 필요한 신앙 나눔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간증이 조금 왜곡되고 과장된 면이 있어, 믿음의 성도는 주의해야 합니다. 간증이 내가 경험한 놀라운 사건이라 하더라도 간증의 초점은 오로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사건 자체의 신비함이나 놀라움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한 일들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기준이지도 않습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간증이라 해 놓고는 내 자랑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해서 내가 중심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하면서도 결국 내 자랑이 되고, 이런 자기 자랑은 왜곡되고 이기적인 종교심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나아가 듣는 이에게는 열등감과 잘못된 신앙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간증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하고 필요한 나눔이지만, 정말 조심하고 주의해야 하며 간증의 초점을 스스로 부단히 점검해야 하는 무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종교 재판을 받고도 무사히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공동체와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24). 이 맥락과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반부에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 눈에 띠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누가-행전의 저자는, 그리고 신앙 공동체는 철저하게 그 모든 초점을 부활하신 예수에게, 예수를 구원자로 세우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간증으로 베드로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 역시 베드로에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루신 일과 그것을 전하는 사명에 집중했습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 드러납니다. 내 자랑은 없고 내게 주신 사명만 남습니다.
간증은 종교 광신자처럼 떠벌리고 다니라는 게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어쩌면 결정적인 대화에서 진심으로, 또한 묵직하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겸손히 고백하는 특별한 일입니다. 간증은 특별하지만 당연한 일이고,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인 일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삶의 태도와 다정한 말투로 언제든 준비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오늘도 몸의 고백, 몸의 증명으로 간증을 지닌 우리라면 좋겠습니다. 온 삶으로 십자가가 드러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