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자기를 위한 믿음

목사wannabe 2025. 9. 17. 06:03
 

사도행전 4장 16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사도행전 4장 16절

자기를 위한 믿음

20250917

 
 

종교 재판을 진행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는 명백한 증인과 증거로 인해 예수의 부활과 표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6). 이 모습이 내가 기준이 된 선악과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믿음의 형태만을 취할 뿐, 자기에게 좋지 않으면 진리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극우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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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중심 사회를 뜻하는 Christendom과 기독교 정체성을 뜻하는 Chistianity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크리슨덤은 기독교의 신념과 생활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대다수 시민의 일상 전반에 기독교적 가치가 실현되는, 또는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하는데, 기독교가 기반이 된 세상을 뜻합니다. 사전적 의미대로만 된다면 크리슨덤은 기독교 이상향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크리슨덤의 모양새에 가장 비슷했던 중세 유럽은 온갖 전쟁과 차별, 혐오와 종교 재판이 횡행했습니다. 모두 신, 즉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일들이었습니다. 사회적 기반과 문화가 기독교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전혀 기독교스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 정체성을 뜻하는 크리스티애너티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뜻하는 말인데,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태도와 마음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향은 크리슨덤christendom이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가 반드시 지키고 이어가야 할 것은 신앙 정체성Christianity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전한 사도들의 삶이, 초기 신앙공동체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 국가를 이루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이곳저곳에 교회를 세우면서도 기독교의 지배를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것은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지, 편 가르기를 하거나 힘겨루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편을 가르고 힘으로 제압하려 했던 이들은 오히려 성전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권력과 권위로 누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6). 부활의 증거를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그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이 폭력적인 말들이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권세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진 타락한 믿음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죄인의 모습은 이렇게 자기를 위한 믿음을 강화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합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돈으로 입막음을 했다면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힘으로 입막음을 시도합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늘의 뜻? 전혀 아닙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조물(성전)입니다. 자기가 왕이 된 세상,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세상이 좋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여러 번 겪었던 것처럼, 지금의 예루살렘에 이스람이 세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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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성도가 지켜야 할 것은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올바른 십자가 신앙과 부활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선한 믿음으로 살아내는 신앙의 삶을 지켜야 합니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믿음이 아닌, 너를 살리고자 나를 내어주는 십자가 사랑을 짊어져야 합니다. 결국 남을 것은 건물이나 사회가 아닌, 믿음-소망-사랑입니다. 결국 남을 것은 너에게 준 사랑, 십자가 사랑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