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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 묵상

말씀은 돌직구처럼

 

 

사도행전 4장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행전 4장 10절

말씀은 돌직구처럼

20250910

 
 

종교재판을 받는 베드로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도망치고 후회하던 모습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담대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ab) 베드로는 적당히 애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이 제일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거 같습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요? 예, 지금은 이게 옳습니다.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직설적으로, 돌직구처럼 내리꽂힙니다. 그래야 외식의 가면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내 마음 속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스물 하나의 젊은 카프카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책은 도끼와 같아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찌르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오직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우리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불우했던 환경에서 많은 고민을 했던 카프카는 패결핵으로 41세에 삶을 마치기까지 많은 글을 썼습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글을 자책하며 출간하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카프카 사후에 남겨진 원고를 하나씩 책으로 엮어내면서 카프카는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카프카는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뜨리고 깊고 깊어진 내면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책은 이렇게 읽어야'만' 압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우리의 독서력입니다. 눈을 빼앗는 것이 너무 많고 쉬워진 이때에 책을 읽는다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평소 문장과 글을 접하는 일이 드물어진 이들에게 성경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요? 실상이 이렇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또한 변질되어 가는 듯 합니다.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은 어느 한두 구절을 뚝 떼어서 멋들어지게 걸어 놓습니다. 프로필에, 인스타에, 각종 SNS에 게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끼처럼 나를 깨뜨리고 세속적 욕망의 단단한 얼음을 깨는 생명의 말씀입니까? 베드로는 심문하는 종교권력자들에게 돌직구를 날립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10a). 이 말을 하는 베드로의 표정이 상상이 되십니까? 고압적인 분위기, 짓눌리는 듯한 시선들에게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겁니다. 쭉 뻗은 직선으로, 상대의 머리와 가슴을 꿰는 직설로, 도끼처럼 쪼개며 복음의 증언이 죄의 곳곳을 찌릅니다.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9a),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b).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담은 말씀은 이렇게 직설적이며 도끼처럼 죄의 얼음을 내리치고 쪼갭니다. 멋진 문장을 넘어 살리는 문장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동일하게 생명의 말씀으로 깨뜨리고 부수며 찔러 쪼개며 나타납니다. 누군가는 아프겠고 누군가는 따뜻할 것이며 누군가는 애통일 수 있습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분노와 거절과 타협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씀은 돌직구처럼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서 필요한 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적당히 잔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배경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느 누군가는 같은 말씀에 깨지고 부서져 새생명이 되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어둔 날의 빛이 되고 광야의 만나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에게 주의 말씀은, 성경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