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5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사도행전 3장 5절
쓸모를 넘어선 관계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전에도 있었을까요?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이는 뭔가 얻을까 싶어서 베드로와 요한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 이때 '바라보다'는 표현은 무언가 받을 준비를 하면서 상대를 보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줄 대상으로서 너를 보고 있는 이 동작은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상대에게서 뭔가 얻기만을 바라는 관계는 얄팍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대영 목사는 저서 <부흥의 사도행전>에서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사람을 주체와 객체로 취급하도록 나누는 선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객체로 본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에 따라 평가하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효용성이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 가치는 사람도 효용, 즉 쓸모로 따집니다. 물론 탁월한 재능이나 실력이 있어 자기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시너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평범한 이들을 폄하하거나 괜한 비교로 열등하게는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기초한 평가일 것인데, 다면적인 인격을 무시하고 나에게 필요한 하나의 기준으로 전부를 폄하하는 비인격적인 태도입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하려는 시도는 폭력적입니다. 오늘날 교회마저도 이런 세속화와 비인격적 폭력에 물들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효용성에 따른 평가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행전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 완전히 달라진 삶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모두가 쉽게 지나치는 미문 앞 걸인을 그들은 새로운 시선으로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말을 거는 이 사람들을 정작 걸인은 효용성으로만 바라봅니다. 몇 푼이라도 내 필요를 채워줄 쓸모로 여깁니다. 이는 아마도 평생 그가 받아온 시선과 평가였을 것입니다. 단 몇 푼이라도 벌어와야 그의 존재는 인정받았을 것이며, 그런 삶이었기에 그도 사람들을 쓸모로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 필요에 기반한 관계는 피상적입니다. 상대를 나의 필요와 쓸모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없어지면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관계가 아닙니다. 이런 가치관에 사도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완전한 변화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이땅에서 성도가 해내야 할 가치이며 관계입니다. 우리 시대에 만연한 자본주의적 관계는 오직 효용성과 유명세,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쓸모가 있는가로 연결하려 합니다. 쓸모가 있을 때는 굽실거리고 쓸모가 없어지거나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냉랭해집니다. 이는 타인을 수단화, 도구화 하는 비인격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쓸모가 아니라 환대여야 합니다. 기꺼이 걸인에게 말을 걸었던 사도들처럼 내 주변의 이웃, 내 곁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정한 마음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조금씩 나의 일상을 충분히 바꿔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약간은 소모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일단 우리의 마음과 결단은 환대여야 합니다. 너를 나에게 보내신 작은 자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고민하는 오늘이기를, 실천하는 오늘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