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교회의 쓸모

목사wannabe 2025. 8. 4. 07:08

 

 

사도행전 3장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행전 3장 2절

교회의 쓸모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을 주목합니다. 그에 대한 사도행전의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2)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대한 설명과 거기에 앉은 걸인은 대조적입니다. 아름답다 한 곳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의 대비는 메말라 버린 종교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내란 특검과 채상병 특검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얼마 전 목사님 두 분의 자택과 집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분 다 국내 교계의 거물이라 할 만한 분들이어서 이 사태를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한쪽에서는 종교 탄압이라 주장하며 핏대를 세웠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싸늘한 냉소를 내비쳤고 여론 또한 좋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피의자 신분이 된 전 해병대 사단장을 구제하기 위해 당시 두 분 목사님이 개입한 정황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기에 섣부르게 잘잘못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또 다시, 개신교를 향한 거센 비난은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며 극우화 된 교회의 폐기까지 말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누가 봐도 뻔한 정치 동원에 교회가 앞장서서 나서는 일들이 도리어 폭탄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정말 쓸모가 없어진 것일까요? 예수님과 사도들을 핍박했던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현대판 교회로 부활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진지하게 교회 됨을 반성해야만 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던 당시의 유대교는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제사와 절기에 참여하며 율법이 정한 일들을 정성스럽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그런 종교 행사,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은혜도 만족도, 그로 인한 삶의 변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걸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사도행전은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2)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성소로 들어가는 10개의 문 중 '니카노 문'을 미문으로 설명합니다. 청동 장식으로 꾸며졌기에 귀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진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오점을 남기듯 걸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와 추의 묘한 대조가 일어납니다. 걸인에게 성전은 생계를 위한 수단입니다. 그에게 성전의 쓸모는 구걸을 위한 가장 좋은 자리, 딱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성전을 오가는 이들은 달랐을까요?  미문에 앉은 걸인에게, 미문을 오가는 이들에게 성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였을 뿐입니다. 이는 나의 만족과 필요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종교의 변질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교회는 다를까요? 우리는 교회의 쓸모를 고민해야 합니다. 나에게 교회는 어떤 쓸모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베데스다도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그런 쓸모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론과 개념이야 여러 말로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로 살지 않으면서 교회를 말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산다는 것, 교회로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단지 예배당을 오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도 옳지도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실한 그 마음과 태도가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런 나를 보며 세상은 쓸모 없는 교회를 말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