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2장 39절
경계를 넘는 그리스도인
회개를 말한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 그 신실한 약속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39). 베드로의 이 말은 혁명적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주셨다는 선민의식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확장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나아갑니다.
근래 기독교서적으로 핫한 <5無 교회가 온다>의 황인권 대표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배경이 다문화이기에, 교회는 기존의 지엽적 접근 방식을 넘어 다문화 사회를 수용하고 경계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교회만 멈춰 있다는 것이 점점 더 왜소해지는 한국 교회에 대한 저자의 진단입니다. 이미 MZ세대는 생산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기성세대로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그들을 다음 세대로 치부하면서 아직 어리게만 본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존중이 아니라 가르침과 수용만 강조하기에 이제 어른이 된 MZ를 붙잡을 수 없는 겁니다. 저자가 "배경"이라고 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을 보면서, 어쩌면 교회는 신앙의 가치를 보수한다면서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고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 자기가 한 말을 되풀이해서 듣는 교회의 현실이 아픕니다. 자기 성찰도 없이 예전처럼 대형 연합집회를 고집하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제 울타리를 넘고 경계를 넘어, 겸손하게 삶의 자리와 관계로 스며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배당을 넘어 일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지금보다 더 아픈 상실을 경험하고 말 것입니다. 이미 서구의 텅 빈 예배당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는 선민사상이라는 어마어마한 경계를 넘어섭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 이 말에는 완고한 두 가지 경계를 넘어서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적 경계를 넘어섭니다. 또한 유대인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경계도 넘어섭니다. 어디에서건, 누구건 간에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약속을 부어주시고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교회의 이름으로 선을 긋고 너와 나를 차별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만, 우리만, 내 가족만, 우리 교회만... 등등 이런 식으로 하는 모든 말들은, 그것이 어떤 거룩해 보이는 포장을 했다 하더라도 거짓입니다. 단연코 거짓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선민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온 몸과 피를 내어주고 허물어 버린 율법적 경계를 오늘날 교회가 혐오와 배제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복음은 막힌 담을 헐고 서로에게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로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누구든 구원하시고 살려내십니다. 해서 필요한 것은 내가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나 엄청난 어떤 행동이 아닙니다. 웃으며 인사하는 것, 먼저 배려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일상의 변화입니다. 삶이 되지 않은 신앙은 예배당 안에 갇혀 있을 뿐, 힘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갇혀 있지 말고 넘어서야 합니다. 생각도, 행동도 갇혀 있으면 나아질 게 없습니다. 작은 경계들을 인식하고 넘어서면서 복음을 현재화 하십시오. 달라질 겁니다. 끝끝내 복음이 성취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