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장 38절
회개가 없는 신앙의 약점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의 찔림을 받아,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과감하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맏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 이 구절에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중 좀 더 무겁게 받아내야 할 말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회개 하고 있을까요?
회개는 기독교 신앙의 정말 중요한 개념이고 실제적인 인생의 전환점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가볍게 여겨지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해서 기독교를 향한 비난 중에 가장 많이 지적당하는 부분도 역시 회개입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딸의 살인범이 자기는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 받았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나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인공은 이에 대해 절규하며 그런 피상적이고 편리한 신앙을 부인합니다. 영화의 그 장면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듯 퍼졌고 지금까지도 왜곡된 신앙의 예시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과거 영국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는 앞으로의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기독교는 거듭남 없이 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 회개 없이 죄의 용서함을 말하는 기독교가 될 것입니다." 이 말처럼, 오늘날 교회는 죄를 향한 날 선 지적과 애통하는 마음은 없고, 적당한 위로와 나이스한 성공과 축복이 가득해 보입니다. 호감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 예쁜 말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교회는 오히려 더 사람들과 멀어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호의적인 접촉이 필요한 것은 이해하지만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다정하기 전에 먼저 더욱 진실한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예쁘지 않아서, 친절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한껏 포장한 예쁨과 세상과 다른 친절이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찢고 부수는 회개의 고백이 교회 안에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회개 없는 신앙의 약점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이어서 그 안에 있는 교인들 역시 연약합니다. 죄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적당히 예쁩니다. 이는 결국 나약한 신앙이 되었고, 나약한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적당히 죄와 타협하면서 교회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복음의 전진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었습니다. 1세기 교회는 예쁘지도, 다정하지도, 뭔가로 포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칠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성령의 권능 안에서-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 베드로는 회개를 요구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이전의 삶, 그러니까 자기중심적인 가치와 선택, 행동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돌아서야만 나아갈 방향과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뒤통수에는 눈이 없어서 돌아서지 않고서는 새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섬이 없이는 변화가 없고, 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늘 다시 무너지는 연약한 종교 생활만 될 뿐입니다.
죄는 관성이 있어 질질 끌고 갑니다. 그래서 매일 돌아서야 합니다. 끌려가더라도 돌아선 채로 끌려가야 합니다. 매일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그 방향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일 회개를 이루십시오. 저녁마다 하루의 죄를 돌아보고 아침마다 새 삶을 맞이해야 합니다. 회개가 될 때까지 죄를 고드러내고 고백하십시오. 회개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될 것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