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화) 한 구절 묵상
아모스 5장 26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장 26절
성경적 공의와 정의
소선지서는 각각 개별의 상황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소선지서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구성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에서 아모스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6)는 소선지서 전체를 압축한 핵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개인적 신앙을 넘어 신앙이 오롯이 성취된 사회적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작금의 우리 시대, 이기적인 교회 현실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한국 교회의 쇠락에 있어 핵심은 신앙의 세속화일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본래 추구하는 경건과 거룩의 관계적 삶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개인의 안위, 사적 성공과 위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 교회의 보수적 특성은 동성애 반대'만'을 고집하며 극우정치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동성애는 마땅히 반대해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각종 종교 스캔들에 대해서는 적당히 침묵하고 은혜스럽게(?) 넘어가는 행태에 사람들은 원색적 비난을 넘어 이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갖는 것조차 낭비로 여기는 것입니다. 3040 세대가 대거 빠져나간 교회의 현실은 평균연령이 60대가 되어버린 고령화입니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교회는 노년 세대의 전유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런 현실과 당연해 보이는 예측에 대해서 여러 논의가 있어왔지만 죄다 탁상공론이 되고 마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회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적 영역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만 보더라도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선한 영향력이 스며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때 확장과 스며드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사가 증명하는 바, 이 방식은 독특하게도 지배나 점령, 군림이 아닌 섬김과 희생, 나눔과 하나 됨이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이 유일한 답입니다. 소선지서의 대다수가 그렇듯 아모스의 시대 역시 물질적 풍요와 번성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선지자가 외친 공의와 정의는 사적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영달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종교적 화려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과 희생이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제와 이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세워가는 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적 가치를 세상에 세우겠다면서 각종 집회와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 사랑을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26) 하라는 선지자의 외침 앞뒤로 하나님은 화려한 제사와 풍성한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절기도 찬양도 그치라 하셨습니다. 먼저 우상을 치우라 하셨습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 하셨습니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아픔의 자리에 함께 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 하늘의 공의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되고, 나에게만 문제가 안 생기면 된다는 식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 공의와 정의는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대가 없는 섬김과 희생으로 짓눌린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작은 자들을 찾고 살피며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대림절기에 나만 좋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사랑을 실현하는 기쁨의 성탄이 되어간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