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월) 한 구절 묵상
아모스 5장 6절
너희는 여호외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아모스 5장 6절
사즉생 (死卽生)
아모스 선지자는 패역한 북이스라엘의 심판을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유일한 살 길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6). 유일한 살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자가 곧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참혹했던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해상 길을 제압한 이순신 장군 덕분이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역사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본래 이 말의 출처는 오자병법입니다. 중국 2대 병법서로 불리며 손자병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자병법의 저자는 오기라는 사람인데, 오기는 76번을 싸워 12번을 비기고 64번을 승리한 전술의 천재입니다. 그가 한 말이 '팔사즉생 행생즉사'였습니다. 장수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전쟁터에서 필사적인 태도로 부딪히고 우유부단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만 살겠다는 얍삽한 계산으로는 갈팡질팡할 혼란할 수밖에 없고, 전쟁터에서 그런 혼란은 곧 죽음과 직결됩니다. 유일한 살 길은 죽을 각오로 정면승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이 이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부강해지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이득이 된다 싶으면 화친을 맺고 강대국의 문화와 종교, 그들의 생활양식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올곧게 지켜야 할 신앙적 기준, 이스라엘의 신앙 정체성까지도 무분별하게 섞이고 혼탁해진 것입니다. 실리를 앞세워 이것저것 주워 담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선지자는 사즉생을 외쳤습니다. "여호와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6). 심판자가 곧 구원자이십니다. 살 길은 심판자 앞으로 돌아오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칠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여기며 온갖 것들로 애쓸 때, 주님은 죽으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죽어서 사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야비한 계산에 대해서 주님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큰 사랑의 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성도 역시 사즉생, 죽어서 살게 되는 신비를 짊어져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겠고 두렵고 불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사즉생일 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마음을 때립니다. 이런저런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죽어야 살게 되는 십자가의 신비가 이미 우리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신비여서, 머리로는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몸으로 받아낼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불법적 계엄과 내란 시도로 온통 혼란스럽고 혼탁합니다. 이와 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표결에 참여하지도 않고 책임을 회피한 국회의원들의 못된 행태에 마음이 비틀어 짜지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도 교인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한 직분도 받았을 것입니다. 아모스처럼 외쳐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를 찾으라!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사즉생, 내 삶의 자리에서 몸으로 섬기며 생명을 일구는 우리 서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