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 구절 묵상

이게 복인가?

 

 

12월 2일(월) 한 구절 묵상

호세아 13장 6절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호세아 13장 6절

이게 복인가?

 
 

하나님을 향한 북이스라엘의 변절은 아이러니 합니다. 남북이 분열하던 그때부터 북이스라엘은 종교적 열등감으로 자기들만의 제단을 만들고 나름 독자적인 여호와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19대 왕들과 9개의 왕조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그들은 남유다보다는 강성했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6) 이 말씀에 찔리는 이유는,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기도가 느슨해지고 타협이 쉬워집니다. 이러면 문제 해결과 나아진 상황은 복인가요, 저주인가요? 여기에 심각한 죄의 본질이 숨어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필요 중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 해결과 평안, 불안 해소 등입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에서 발표한 리서치에 따르면 무종교인이 생각하는 종교의 유익(중복선택)에 대해서 76%가 위안과 위로, 73%가 내적 평화, 66%가 문제 해결과 고난 극복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종교인 중 42%는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는 작금의 종교가 현실에 대해서 그다지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현실에 대답과 대안이 되지 못하는 종교는 수요가 줄어들게 마련일 것인데, 여기에 교회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성 상 세상이 원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상황이 나아지면 느슨해지고 마는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질 거라 말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우고 나아가 문제를 미리 피해가는 역량이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준비하고 예방한다고 해도 각각의 인생은 어쩔 수 없이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고, 자신의 역량을 초과하는 위기를 겪으면 누구라도 한번 쯤은 종교를 찾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존재를 찾는 것은 본능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패턴으로 교회를 찾아온 분들 중에는 신비한 하늘의 은혜나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입니다. 급한 문제가 해결되면 그전의 절박함이나 간절함이 사라지고 신앙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러면 문제를 해결한 기도의 응답, 신비한 은혜는 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오랜 억압과 폭정에서 벗어나 매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명을 구원하셨는데, 출애굽 1세대는 배가 부르니 오히려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신뢰와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섰습니다. 이런 행태를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그와 같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받아 누린 것으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해서 올바른 믿음은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나 한결 같은 신실함입니다. 

절박함이 사라졌거나 신앙이 느슨해졌다면  그 현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날들에 대한 감사가 옅어졌다면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이 주신 값진 것들을 퇴색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또 다른 죄에 빠지도록 미혹합니다. 심지어 기도와 응답조차 죄의 틈이 되기도 합니다. 해서 날마다 신앙을 점검하고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오늘 내게 주신 구원이 어떤 결과를 결실하는지를 예리하게 따지면서 순종에 나를 내어드리면 좋겠습니다. 신실함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