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 구절 묵상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1월 13일(수) 한 구절 묵상

디모데후서 1장 11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디모데후서 1장 11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바탕으로 디모데 역시 흔들림 없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11)고 말했는데, 복음은 나를 만족시키기도 하지만 역으로 복음으로 인해 내가 쓰임 받아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 신앙에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오래 전, 교회에서 어느 청년이 나누었던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이루어주실 거야.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불행한 것을 하나님이 하실 리가 없어." 이런 말은 하나님을 굉장히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점은 정확히 옳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과 영생을 말합니다.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는 이 좋은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빚어가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길은 때론 거칠고 아프기도 합니다. 나의 죄된 것들을 깨뜨리시고 다듬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해서 하나님께는 옳으나 죄인인 나에게는 아프고 싫은 상황, 심지어 그 순간에는 불행하다고 느끼기까지 하는 일들이 허용됩니다. 이런 이해가 없이 기계적으로 '사랑 = 내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자체로 우리는 선악과를 먹어버린 죄인의 실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다루고 빚어가시는 근거입니다. 내 만족을 채워주는 복음이면서 또한 내 죄악 된 욕망과 그로 인한 가짜 만족은 철저히 깨뜨리시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게 합니다. 만족의 기준이 역전되는 것이 복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인간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어떻게 갈등을 빚어내고 서로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지를 내밀하게 그려냈습니다. 헤밍웨이는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타인의 생명을 기꺼이 죽일 수 있는 신념과 가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 지를 아름답게(?) 그려냈는데,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기준과 만족이 타인에게는 폭력과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아픈 성찰을 담아낸 명작입니다. 개인의 가치와 기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각자의 만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해서 바울은 내가 만족하는 복음 이전에, 자신을 복음에 합당한, 복음을 위한 존재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나를 만족시켜 달라는 종교적 아우성이 가득한 교회와 세상의 현실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냉수와 같습니다. 내 만족을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내가 그려낸 동화 속 산신령일 뿐, 진정한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나여야 합니다. 기준이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역전되어야 합니다. 기준이 달라질 때 삶이 달라집니다. 복음의 기준에 순종하여 하늘의 삶이 됩니다. 땅을 딛고 살아도 하늘을 걷습니다.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려야 하는 걸까요? 내가 우선이 된 이기적인 기준이 있지는 않은지 믿음의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좋겠습니다. 헤밍웨이가 인용한 종은 조종(弔鐘), 즉 죽은 자를 기리는 종소리였습니다. 슬픈 종소리의 주인공이 나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주를 위한 삶,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는 삶일 때, 우리는 가장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