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수) 한 구절 묵상
시편 107편 42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시편 107편 42절
섭리 안에서 살기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순환적이며 동시에 직선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큰 일을 하는 자들을 높게도 하시고 낮게도 하십니다(23~32). 왜냐하면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방식에 대해서 시인은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42)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감히 헤아려 볼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이라면 이 주권적 섭리에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길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왜곡 중 가장 교묘한 것은 고난에 대한 부정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과 고난, 아픔을 허용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막상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원망스러움이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사랑하니까 잘 되게 해준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매를 들라고 했고, 훈계와 징계를 아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송이천은 <소년등과불일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성공이 인생에 꼭 좋은 것만은 아닌 이유는, 인생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인간의 죄성과 그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거친 사랑의 손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교인들이 섭리를 오해합니다. 문제가 잘 해결되거나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것을 섭리라고 말할 뿐, 고통이 드리우고 고난이 닥칠 때도 섭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는 섭리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문제가 없이 잘 되고 하는 것마다 성공하면 하나님을 더 높일 거라 여기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좀 괜찮아지면 말씀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적당해지고 느슨해집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계산이며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사악함"입니다. 이런 죄인의 현실을 꿰뚫어본 시인은 고난과 아픔을 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거친 손길로 이해했습니다. 이를 섭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여 하늘의 섭리는 결과적인 구원을 전제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빚어가심입니다. 모난 부분은 깨뜨려 깎아 내고 패인 곳은 덧붙여, 구원에 합당한 삶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고난도 합당합니다. 성숙한 믿음의 성도는 고난으로 어려울 때 원망스러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섭리로 받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고난도 선한 뜻이 되게 하실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믿음을 성찰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구원은 이미 결정된 결론이기에 가장 좋은 것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복음의 결론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 되지 않은 일은 잘 되지 않은 그대로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섭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선한 의도도 내가 바라는 좋은 결과가 아닐 수 있기에, 하늘의 섭리를 헤아리고 순종하라는 사랑의 권면입니다. 그러니 섭리 안에서 사십시오. 내 기대와 달라도 하나님의 뜻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무엇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