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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 묵상

방부제 같은 신앙

 

 

10월 25일(금) 한 구절 묵상


예레미야애가 4장 1절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예레미야애가 4장 1절

방부제 같은 신앙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애가의 시인은 변질 된 신앙의 현실을 토로합니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1). 금은 변하지 않는 성질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금이 변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었다고 슬퍼합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질되어 버리면 정작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기에 적응력이 지능처럼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최신 스마트폰을 가져도 전화와 메시지 정도, 유튜브 정도만 사용할 뿐 다양한 활용을 하지 못하면 무능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우리 현실에 만연하기에 적응력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능 같아졌고, 해서 배우려는 자세가 필수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기존의 낡은 것들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개혁적 선구자는 되지 못해도 그 결과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응력이 이토록 중요하다고 해도, 삶에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존재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변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이를 본질이라고 표현하면 이해가 쉬운데,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본질이라면 변하는 것은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기술에 굴종하게 된 인간의 실상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마법과 응용과학의 중심 과제는 어떻게 실재를 사람들의 욕망에 굴복시키느냐는 것이고, 그 해결책은 바로 기술입니다. 이러한 기술을 실행하면서 마법이나 응용과학은 모두, 그 전까지 사람들이 꺼려하고 불경한 것으로 여겨왔던 일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루이스의 말을 따르면 기술은 욕망을 현실화하는 최적의 도구이고, 사람들은 기술에 적응하면서 욕망에 굴복하게 됩니다. 매우 잘 적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욕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이러면 욕망의 존재는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본질이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개혁적인 무엇, 그러니까 기술적 혁명보다는 진정한 삶의 지혜인 순응을 주장합니다. 영혼을 실재에 순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지혜자들은 순응을 위해 지식, 자기훈련, 덕 같은 것을 끊임없이 수행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기술을 도구로 욕망에 굴복한 영혼은 실재와 본질을 잃고 욕망으로만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의 성도에게 주신 삶이 아닙니다. 삶의 실재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금이 변해버린 것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변해버렸고 그 변명으로 편리, 욕구, 즐거움, 가짜 만족, 열등감 등을 피력할 뿐입니다. 이러면 삶이 구차해지고 공해질 뿐입니다. 애가의 시인은 이런 변명들로 변질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의 결과를 맞았다고 슬퍼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편리와 이데올로기, 정치적 결탁으로 변질된 교회와 나를 겨냥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청년 예수의 청량한 목소리가 절실한 때입니다. 

변질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를 삽니다. 돌보고 섬기고 희생하기 보다, 교회도 구호를 외치며 선동하고 무리를 지어 힘을 과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절입니다. 과연 힘대 힘으로 세상을 지킬 수 있을까요? 십자가와 전혀 다른 그 모습이 변질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기술적 작용(힘)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순전한 삶을 통해서입니다. 해서 방부제 같은 신앙이 필요합니다. 오늘이라는 세상에서 순전한 말과 행동, 따스하게 덮어주고 온화하게 권면하며 너를 위해 섬기는 십자가의 삶이 변질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