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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 묵상

교회가 놓친 "대화"

 

6월 6일(목) 한 구절 묵상


베드로전서 3장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장 15절

교회가 놓친 "대화"

세상에 대한 믿음의 답으로 성도의 선행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베드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은 기꺼이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것(13-14)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착한 일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의 섬김입니다. 계산적인 주고 받음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처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나아가 이런 삶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면 "너희 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13)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대화입니다. 

래리 크랩의 명저 <내 영혼은 이런 대화를 원한다>는 모든 교회와 성도가 꼭 읽어야 할 필독서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인 믿음의 대화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가 나누어야 할 대화는 누군가에 대한 가십이나 뒷담화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교회를 병들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이런 세속적 대화,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겉도는 말들이라고 진단합니다. 이런 말들은 가볍지만 결과는 아프고 무겁습니다. 누군가의 가벼운(?) 말에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마음을 열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의 유형 중 하나가 "가르침"일 수 있습니다. 나는 가르쳐 주려는 선한 의도로 한 말인데 너에게는 상처가 되는 경우입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정말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너무 흔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왜 이러는 것일까요? 진심의 대화는 없고 가르치려고만 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서는 이에 대한 올바른 순서를 알려줍니다. 선행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한 행실을 물을 때 온유와 두려움을 대답하는 것이 나중입니다(13). 안타깝게도 교회는 순서를 바꿔버렸습니다. 순리가 아니라 역리가 되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교회는 역리로 가득합니다. 선한 행실을 하기 전에 먼저 가르치려 듭니다. 아니, 가르쳐야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교회가 양육이라는 명분으로 세미나를 하고 교회마다 우악스러운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그 결과 강연하는 이는 많은데 대화 하는 이는 적어졌습니다. 영혼의 대화가 자리를 잃었습니다. 듣고 배우는 일은 많은데 마음을 내놓을 곳이 없습니다. 물론 올바른 가르침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순서를 따집니다. 사랑의 섬김이 먼저이고 설명이 나중입니다. 설명도 가르쳐서 바꿔 놓겠다는 우악스러움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대화, 공동체를 살리는 영혼의 대화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대화가 절실합니다. 진정한 대화 한 번이, 사랑의 대화 한 번이 죽어가는 마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르치려 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그냥 끝까지, 따지지 말고 끝까지, 틀린 말이 나와도 끝까지, 그 마음이 다 쏟아질 때까지 들어주십시오. 그럴 때까지 먹여주고 입혀주십시오. 이런 대화가 가정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너를 살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나를 살립니다. 내가 여전히 너를 가르쳐서 뜯어 고쳐 놓겠다고 한다면, 그 결실은 끝끝내 나의 메마름이 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