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수) 한 구절 묵상
열왕기상 21장 11절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열왕기상 20장 11절
감각 없는 자
열왕기상 20장은 아합과 벤하닷의 에피소드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임하기 전에 일어난 북이스라엘의 상황을 열왕기서는 짧은 에피소드로 엮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로 승리하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합의 영적 무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리한 분별력 없이 이리저리 계산하며 반응할 뿐입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장로들의 말에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11)고 말하며 기세등등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여전히 무감각합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감수성과 진정성입니다. 감수성은 정서로, 진정성을 의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라서 감수성을 진정성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말씀에 감동 받았음에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바로 감수성과 진정성, 정서와 의지를 착각한 상태입니다. 이에 대한 예리한 분별을 하지 못한다면, 예배한다면서도 정서적인 반응만 할 뿐 의지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말입니다. 모여서 떠들썩하게 예배하고 교회 안에서는 뜨겁지만 일상에서는 허약하고 의지박약을 삽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 정서적인 위로와 감동을 추구하는데, 이는 내 감동만 계산하고 추구하는 자기연민의 왜곡된 신앙일 뿐입니다. 이런 반복으로는 아무리 감동해도 결코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합처럼 말입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32명의 부족왕들을 이끌고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역시 막강한 군사력과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왕은 벤하닷의 침공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나라의 장로들을 불러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벤하닷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쉽게 무시하면서도 정치적인 지지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 자기 계산이 철저할 뿐, 하나님의 뜻에는 무감각한 사람이 바로 아합입니다. 우리가 이럴 수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따끔한 질책으로 진짜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의 요구에는 무감각할 수 있습니다. 위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위로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변화와 순종에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뜨거운데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연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감각 없는 자(엡5장)라고 말했습니다. 정서에는 민감해도 의지에는 무감각한 상태, 말씀과 찬양에 감동 받고 뜨겁게 기도했더라도 일상의 순종은 없는 가식적인 신앙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정서와 의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서에 따라 의지가 휘둘리고 결국 정서를 핑계하는 적당한 자기 만족의 신앙을 하고 맙니다. 이러면 평생 교회를 다녀도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삶은 믿음으로 변화되고 구원의 은혜로 달라지는 성숙한 삶입니다.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무감각한, 감각 없는 자는 자기 정서에만 예민할 뿐 순종에는 무딥니다. 믿음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예민하게 순종을 헤아려 보는 참된 믿음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