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절 묵상

교수가 아니라 전도자

목사wannabe 2026. 7. 7. 06:23

사도행전 8장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교수가 아니라 전도자

20260707

 

빌립을 통해 예수의 복음을 들은 에디오피아 내시는 오아시스를 만나자 기뻐하며 세례를 청합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6) 내시가 세례를 청하기까지의 빌립의 복음 설명은 지적인 주해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최초 신앙공동체가 그러했듯이 회개와 죄사함, 세례, 그리고 세레를 통한 성령의 임재와 선물까지, 빌립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는 교수가 아니라 전도자,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의 핵심은 지금도 지속적인 개혁을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고인 물이 썪는다는 말처럼, 개혁교회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변화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는 매우 중요한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서로 다른 이해가 개혁이 아닌 갈등과 분리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개신교 교파와 교단이 250여 개가 넘습니다. 세계적인 이단이 발생 된 곳도 우리 나라입니다. 지금도 신학과 교회는 갈등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고, 학문적 접근과 신앙적 접근의 차이점과 이해, 수용과 한계에 대한 건강한 토론과 합의는 멀어 보입니다. 21세기 종교재판이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적 접근과 이해와 실제 신앙생활의 성숙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리한 분석과 설명, 학문적 이해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혐오의 정서를 입어 상대방을 덮어버릴 때, 결국 이런 일들은 권력의 결과가 되고 맙니다. 힘 쎈 쪽, 목소리가 큰 쪽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설명을 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성숙한 증인이 절실합니다. 오늘날 우리네 교회가 갖추어야 할 것은 더 정확한 설명보다, 더 실제적인 신앙의 성숙이 아닐까요? 사도행전의 빌립이 보여주듯 말입니다. 성령에 순종하여 사마라아를 뒤로 하고 광야로 내려간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역시 성령에 순종하여 그 수레에 달려가 먼저 말을 걸었고, 그에게 고난 받는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내시는 세례를 청합니다. 사도행전의 순서에서 보자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나아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회심과 세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이 이렇게 현실화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빌립의 역할입니다. 그는 이사야의 글을 예수의 복음으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학적 주해나 학문적 이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내시에게 전하는 빌립의 마음과 태도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자신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험했던 사랑과 회개의 세례, 성령의 은사와 체험적인 사건들 모두 삶을 통해 증거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내시가 기뻐하며 세례를 청했을 거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교리적 설명도 빼놓을 수 없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실한 삶의 태도와 몸으로 담아내는 복음입니다. 말과 삶이 하나가 되어가는 복음의 진정성입니다.

​정확한 지식, 보다 많은 앎도 좋지만 아는 것을 살아내는 결단과 그런 성숙함이 더 필요합니다. 책상 위의 지식이 현장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은 결과, 우리는 영향력 없는 교회와 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서 오늘도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복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몸으로 살아내려 애쓰는 그 진심을 세상이 보고 읽을 것입니다. 오늘 살아내는 말씀이 우리의 전부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