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고 너 죽자
사도행전 7장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나 살고 너 죽자
20260514
재판은 더 진행되지 않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끌어내 돌로 쳤습니다. 그 현장에 뜻밖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38). 증인들의 옷을 지켜주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나 살려고 너를 죽이는 현장에, 그 중심에 이 사람 사울도 있었습니다.
놀부의 노래를 아십니까? 놀부는 '내 것도 내 거, 네 것도 내 거' 라고 노래합니다. 반면 마음씨 착한 흥부는 '내 것도 네 거, 네 것도 네 거'라고 노래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건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종의 도덕률입니다. 그럼에도 이웃의 것을 탐하고 그런 탐욕을 위해서 타인을 헤치는 것은 시대와 문화를 통틀어서 모두 죄로 규정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나 살려고 너를 헤치는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경우는 '정당방위'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당방위도 매우 까다롭게 따져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정당방위를 넘어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타인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나쁜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나 살려고 너에게 해를 끼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빈번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잘못된 걸 알고도, 또는 보고도 묵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동조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울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종교처형 장면에서 뜻밖에도 사울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는 증인들의 옷을 지켰는데, 이때 증인들이란 종교재판의 주역들, 그러니까 산헤드린 공의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의 옷을 지켰다는 건 사울이 이 재판의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 앞에 두었다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의 직책과 주권을 인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증인들이 사울의 발 앞에 옷을 두었다는 건 사울이 권위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흐름에서 볼 때, 이 설명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자신들의 종교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타인을 죽이려는 이들 속에 사울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나 살기 위해 너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유대교의 율법이라면, 복음은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희생입니다. 유대인들, 성전주의자들도 복음을 듣기 원했던 스데반의 희생적 태도와 나 살기 위해 너의 죽음을 묵인하고 동조하고 있는 사울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이 둘의 모습 중 나는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
나 살려고 너를 무시하고 짓밟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이런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속 문화와 가치 속에 교회와 성도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은 다른가요? 세상 속에 살아도 세상과 다른 구별 된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나를 내어주고 너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상과 다른 길입니다. 해서 세상과 다른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나를 희생하지 않을 때 복음은 말만 번지르르한 헛것이 되고 맙니다. 나를 내어주는 복음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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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질문
1. 증인들이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2. 나를 내어주는 구체적인 복음의 행동 2가지를 정하고 실천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