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의 기준
2026 사순절 [출애굽의 길] 39 움직임의 기준
출애굽기 40장 36절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붙잡으셨고, 징계는 하셨지만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끄셨습니다. 그 방법이 이스라엘 중심에 자리잡은 성막과 그 위에 자리 잡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준, 행진의 기준이 이것입니다.
성막에 대한 그동안의 이해는 대부분 예배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막은 예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 가득히 임재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며 예배받으시지만,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동의 기준점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자기 뜻대로 갈 수 없는 삶이어서, 출애굽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자유를 누리면서도 방종이 아닌, 믿음의 책임을 짊어집니다. 이는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과 따름을 뜻합니다. 따라서 광야 길은 삶의 방향과 속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자발적이면서도 책임적인 순종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붙들어주는 장치가 아닌, 하나님께 붙들린, 공동체적 이동의 중심축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정반대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순종보다 제각각 자기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결국 하늘 순례의 걸음이 아니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정주를 목적으로 신앙이 변질되고 뒤틀립니다.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거룩을 가장한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면서, 결정적으로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의 이기적인 신앙이 될 뿐입니다. 출애굽의 걸음이 수십 년이었다는 건 성막을 중심으로, 그 위에 자리 잡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수십 년간 떠오르고 내려앉는 일을 반복해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고, 동행하셨고, 그 길의 기준이 되셔서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그랬는데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 얼마 못 되어 변질되고 말았다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고 예외이겠습니까. 내 삶의 움직일 때, 그 기준이 성막이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 기준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나 중심의 이동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의 이동인가요? 이 구분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야 하겠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했습니다. 대단히 나쁜 짓을 해서 악인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라면 작은 것일지라도 죄와 악일 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겠다고 도망친 이들처럼 말입니다. 해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움직임의 기준이 정말 하나님이 맞습니까?
말씀질문
1. 출애굽기 40장이 보여주는 출애굽 이스라엘의 이동은 무엇이 기준이었습니까?
2. 움직여야 한다면 기준을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움직임인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진솔하게 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