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이 결실하는 것
사도행전 7장 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방황이 결실하는 것
20260203
스데반의 변증적 설교는 모세가 광야에서 보낸 방황의 40년과 하나님의 임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구원으로 연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30) 히브리인들에게 거절당한 모세처럼 예수님도 거절당했으나,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신 것처럼 예수님을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이 중요한 맥락입니다. 버려진 것 같은 방황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일본의 전통문화 중 칸츠기라는 도자기 공법이 있습니다. 매끈한 도자기를 일부러 깨뜨린 후, 그 조각들을 금으로 이어 붙여서,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기법인데, 단순히 금이 추가되어서 가치가 올라갔다기 보다는, 깨진 조각들을 더 아름다운 모양새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뛰어난 가치를 지닙니다. 흔적을 없애고 덮는 게 아닌, 깨진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작품성을 증명하는 칸츠키 기법은 인생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세상은 작은 실수도 확대해서 실패와 좌절로 만들기 일쑤입니다. 해서 사람들은 실수는 감추고 못난 것은 예쁘고 보기좋게 바꾸려고 애씁니다. 성형은 이제 너무 보편적인 일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과거를 감추고 감춘 것을 일부러 들추는 살벌한 일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합니다. 매끈하게 흠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인생도 그래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조금 다른 관점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등장 인물들의 실수나 실패를, 심지어 죄악도 거리낌 없이 폭로합니다. 이는 구원의 절대 주권이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드러내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와 실패, 방황과 죄로 깨진 인생도 모두 담아내고 빚으셔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모세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30) 스데반은 도망하고 방황한 모세의 40년을 "사십 년이 차매"라고 표현했습니다. 찼다는 말은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체성을 잃고 나라를 잃고 방황한 거 같은데, 스데반은 때가 찼다,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가치의 변화입니다.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40년의 시간이 방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빚어가시고 때를 위해 견뎌내게 하신 시간이라는 이 설명은 가슴 떨리는 위로이며 감동입니다. 하나님은 방황으로도 결실하십니다. 깨진 도자기 같이 조각난 인생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하나 주워 담으시고는 다시 이어붙이고 새롭게 빚어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 주권 안에서는 방황도 길이 되고, 방황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이것이 방황하는 인생에게 주신 약속이며 주권입니다.
방황하는 것 같습니까? 괜찮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방황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더 집중해야 합니다. 방황의 의미가 당장은 모호하고 불명확할 테지만, 그럴수록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게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방황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관건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하나가 전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가, 지금도 하나님 사랑을 갈망하는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