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사도행전 7장 11절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20260114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요셉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 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11) 흉년은 애굽과 가나안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픔과 굶주림은 약속 받은 백성이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고통과 기근입니다. 하지만 의미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환난도 길이 되고 방법이 됩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철학자 니체는, 당시 기독교의 구조적 억압과 교리를 무기로 착취했던 종교의 실체에 반발했습니다. 순종이라는 명분으로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기독교는 니체에게 있어서 더 이상 도덕적 모범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해서 니체는 스스로 일어서는 불굴의 사람 '초인'의 개념을 내세우는데, 이를 위버멘쉬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따르는 비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극복하며 초월하는 초인은 삶의 고통까지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기독교적 시각에서는 자기 구원의 전형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그가 살았던 시대 배경을 고려한다면 (인간중심적 한계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에서 바라 보는 니체의 한계는 고통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 증명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환난과 고난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이것이 비이성적인 순응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파하면서 더욱 깨어, 섬세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현하는 신앙 의지를 뜻합니다. 이를 히브리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의 삶을 통해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 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11). 기근과 굶주림은 가나안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습니다.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야곱이라고 해서, 약속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7년의 대흉년을 통해 야곱과 요셉이 다시 만나는 섭리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성도는 당장의 고난, 무너질 것 같은 실패와 고통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하고 받아내며 넘어서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큰 그림, 구원의 경륜이 약속되었습니다. 내 몫은 그 과정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해서 우리도 고통과 아픔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믿음은 고통이나 실패, 좌절까지도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구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이미 은혜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해서 나의 오늘은 시련을 넘어서는 오늘입니다. 또다시 도전하는 오늘이며, 어제보다 더 순전하고 더 희망찬 오늘입니다. 소망의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