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모호성
사도행전 7장 3절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약속의 모호성
20260105
스데반은 법정에서 자기를 위한 변론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시작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으로 열어갑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3) 하나님의 이 말씀은 모호합니다. 구체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특징입니다. 이 모호한 말씀을 과연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 신앙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약속이라는 건 구체적일수록 신뢰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 이유는 대 부분 '나중에' 해주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아이에게 '나중'이라는 건 안 해주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 아이들은 엄마아빠의 나중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안 믿는 말 중에 하나가 '나중에 언제 한 번, 우리 밥 같이 먹자'는 식사 약속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을 지가 하나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치고, 실제로 만나 마주하는 일은 희박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약속의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구체적일수록 실현가능성이 커지고 든든한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대의 마지막은 법적 계약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신앙은 구체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매우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약속과 예언, 응답이 있긴 하지만, 성경 전체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메시아의 오심, 다시 오실 주님, 마지막 심판과 종말은 모호합니다. 특정한 시기, 때, 방식 등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구원과 심판 같은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덮고 가리고 감추시는 걸까요? 이것이 우리 믿음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열린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결말은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관건은 그 결말까지의 여정입니다. 이 여정을 우리는 믿음생활, 신앙생활이라고 부르고 위대한 작가는 '천로역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 역시 계시된 결말과 이것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유대교는 이 여정에 실패했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호한 약속부터 시작해 짚어갑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3) 도대체 하나도 정확한 게 없습니다. 땅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약속을 내게 주신다면, 과연 나는 믿고 떠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믿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도착할 땅은 이미 존재합니다. 믿고 행동하면, 그러니까 떠나고 걷고 나아가면, 끝내 그 땅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관건은 정말 믿느냐, 해서 떠나 걷겠느냐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의 결론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설명합니다. 다만 우리는 다 알 수 없고 죄에 빠져 무지하다는 게 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율법과 복음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내게 주신 믿음의 여정은 하나도 설명된 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제 믿음 만을 가지고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 모호한 약속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내는 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하여 오늘이 중요합니다. 나의 오늘은 약속이 성취되고 현실화 될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새해 첫 월요일인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고민과 책임으로 믿음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