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인 복음, 행동하는 성도
사도행전 6장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역동적인 복음, 행동하는 성도
20251222
구제와 목양의 균형을 위해 초대 교회가 세운 일곱 명의 일꾼 중에 사도행전은 스데반을 소개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사도들만 행하던 기사와 표적이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복음이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는 모습을 스데반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는 복음의 역동성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이에 순종하는 성도의 행함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관계>의 저자 김일환 목사는 책에서 교회의 훈련과 양육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조국 교회에서 경건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훈련시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름은다양해도, 방법은 화려해도 대부분 마음의 훈련들입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은 분명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하는 행위들입니다." 저자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의 양육이라는 것이 바이블스터디 형식을 취하면서, 대부분 세미나로 진행되었습니다. 세미나는 말 그대로 강의입니다. 저자의 지적처럼 '책상 앞에, 의자에 앉아서'하는 일들입니다. 제자훈련이라는 것 역시 모여서, 앉아서 하는 일들로 진행되었는데, 내용은 좋고 깊이가 있었어도 적용과 실천과 점검은 약간 뒷전이 되면서 반쪽짜리 양육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머리만 커진 교인'이 양산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현실이 수 십 년이 지나고 쌓여 오늘날 교회는 거룩한 말을 하지만 더 세속적인 욕망의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중세의 가톨릭이 몰락했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은 아닌가, 곳곳에서 우려가 쏟아지는 요즘입니다. 복음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책상 앞에, 의자에 앉아서 말만 하고 있는 게 문제의 실체입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복음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소망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고 회심과 돌봄이 불같이 일었습니다. 복음은 경계를 허물고 점령해 갑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안에서 성전의 경계, 성직의 경계를 허물었고,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전진합니다. 그 시작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을 처음 소개하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사도들을 설명할 때만 나오던 표현이 사도가 아닌 사람, 특히나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을 설명하는 말로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바깥에 살던 사람입니다. 해서 헬라어에 능통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예루살렘 너머 헬라로 전하는 데 그의 말과 행동이 주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책상 앞에서, 의자에 앉아서 세미나하듯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행동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멈추지 않는 복음으로 멈출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몸을 써서, 손과 발을 사용해서 복음을 행동했습니다. 이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멈추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행동하십시오. 말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안에 복음이 일하시기에 작은 것일지라도 꾸준히 반복하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어야 합니다. 적당히 하다 관두는 일은 복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도 복음에 순종하여 섬기고 나누고 기도로 품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