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복음을 살아내기
사도행전 5장 30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불편한 복음을 살아내기
20251125
재판정에서 너희 때문에 성전과 유대교가 피해를 본다는 성전 권력자들의 협박에 사도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면돌파를 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30). 사도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도의 결과로 받아냅니다.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피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이렇게 응답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며, 성령의 권능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믿음이 좋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부분 누군가를 칭찬할 때 사용하는데, 충성스럽게 헌신하거나 중요한 어떤 일을 감당할 때,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주로 눈에 띠는 일들이라는 점입니다.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칭찬이 잘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인들의 바람도 눈에 드러나는 어떤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고 바라는 성공, 성취를 이루어야 믿음이 좋다고 여깁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식의 생각과 가치는 세속적입니다. 여전히 경쟁과 소유 중심으로, 편리함이나 편안함 같은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가치를 바르게 가르치기 보다 세속적 가치에 적당히 타협할 때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할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만 하신 일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신앙이라는 것은 내재화 되지 않고 타자화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증언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모습은 안전하고 잘 되고 크게 성장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핍박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4장).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었는데, 재판정에서 사도들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30). 짓누르는 권력자들의 말들 속에서도 사도들은 당당합니다. 오히려 찌르듯 권력자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예수를 죽인 이들은 로마가 아니라 성전의 사람들이라고 정곡을 찌릅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를 증언합니다. 담대한 증인이 되어 조금도 물러섬 없이 부당한 권력에 복음을 쏟아냅니다. 이 부활의 복음이 믿는 자에게는 영광이지만 그들에게는 쓴소리였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불편합니다. 손해를 봐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기도와 삶은 어떤 것일까요? 핍박과 손해와 아픔이 없게 해달라는 게 아닌, 그런 불편함과 아픔에도 무너지거나 타협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잘 나가는 세상 속에서 복음은 본래 불편한 것입니다. 불편하지 않다면 복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서 기꺼이, 의도적으로 믿음의 성도는 복음의 자리를, 복음에 옳음을 찾아야 합니다. 적당히 머물지 말고 십자가의 섬김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불편한 복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금 더 내어주고 나는 조금 더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로 내가 이렇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나를 통해 누군가 사랑을, 위로를 누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내게서 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