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태와 현실태
사도행전 4장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가능태와 현실태
20251017
사도행전이 전하는 교회의 모습이 정말 독특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 그리고 일상이 하나로 연결된 전인격적인 변화로 나타나는데, 사도행전은 그것을 소유의 포기와 나눔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동력이 부활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33). 부활의 증언을 전하는 이들에게 큰 권능이 있었고, 부활의 증언을 받은 이들에게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부활은 가능성을 넘어 현실을 바꾸는 실제적인 힘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능태 - 현실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가능태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각자의 현실에서 꺼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데, 이를 현실태라고 설명합니다. 가능성이 현실에서 실체가 된 어떤 결과를 뜻합니다. 문제는 가능태가 온전히 전부 현실태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함의하는 철학적 개념이 더 깊고 넓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가능태와 현실태는 무한한 가능성과 유한한 현실적 실체 사이의 긴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 생활을 가능태와 현실태로 비유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태로, 말씀에 순종하는 나의 삶을 현실태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건강하고 바른 신앙 생활은 교회를 오가는 식의 단편적인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신앙적 변화입니다. 여기에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어도 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즉 현실태가 부정확하다면 (혹은 단절되어 있다면) 이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교회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바른 연결을 보여줍니다. 함께 기도한 그들에게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작은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서로 돕고 섬기는 은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원동력이 바로 부활의 증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33). 핍박의 상황에서 부활의 증언은 어쩌면 가능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지 당장 나의 부활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몸으로 살아가야 할 일상은 고되고 힘겹고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부활을 가능성으로, 가능태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은 "큰 은혜를 받아"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는 지금 달라진 삶, 즉 지금 살아내는 부활입니다. 여전히 내 몸은 여기에 있고 내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땅을 딛고 있어도 하늘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의 현실입니다. 부활의 가능태가 지금 내 삶의 현실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의 것이 우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요를 따라 흐르고 돌아야 할 수단일 뿐입니다. 집착할 이유도, 쌓아야 할 근거도 없습니다. 알맞게 쓰이면 됩니다. 은혜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온갖 좋은 말들이 많지만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신앙이 가장 영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부활의 약속을 가능성으로 두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실현된 현실태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매일이 새롭고 새로운 날들입니다. 오늘이라는 생명을 주셨으니 오늘 부활을 살아내십시오. 오늘 사랑을 실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