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3장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도행전 3장 8절
동행이 필요하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걸인을 잡고 일으켰을 때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 사도행전은 정말 놀라운 기적을 보여줍니다. 이 기적은 단지 장애가 치유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평생 소외받던 이에게 동행이 생겼습니다.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기독교 장례를 집례할 때마다 아쉬운 점은 공동체의 위로라는 것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임종 후에 입관까지의 시간은 유족이 가장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인데, 그때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가 거의 없습니다. 출관할 때 운구가 없는 일은 너무 흔합니다. 화장장에서 가족만 남아 있는 경우도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몇 번의 예배를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교회는 장례에 대한 적당한 예의를 차린 듯 하고, 공동체는 그런 식으로 유가족을 홀로 두는 일이 배려와 매너인 양 여깁니다. 복음과 공동체, 위로와 동행을 찾아보기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장례에는 "곡비"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문상객을 받아야 하는 상주를 위해서 옆에서 울음 소리를 내주는 역할을 곡비라고 합니다. 비록 돈을 받고 하는 종의 신분이지만 곡비는 최선을 다 해 진심으로 울어야 했습니다. 장례의 짧고도 긴 시간 안에서 함께 울어주는 그 소리가 특별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곡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만, 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상여가 나갈 때까지의 곡비의 통곡 소리로 그 장례를 평가했다고도 하니, 우리 삶에 이런 동행은 당연하면서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걸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걸 뿐이던 일상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어준 이들이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병을 고쳐주기까지 했으니 정말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서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합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 진짜 중요한 기적은 이것입니다. 그 걸인과 함께 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늘 혼자였던 그가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차별과 소외, 정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수평의 관계-수직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막힌 담을 허물고 죄로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이 한 구절의 설명은 십자가의 형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차별의 성전이 이제는 자유로운 찬미로 가득합니다. 구경만 하던 성전, 돈벌이의 수단이던 성전이 아니라 나의 예배와 고백, 무엇보다 사랑의 동행으로 누리는 참된 성전의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함께하는 것, 동행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해서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에게는 동행이 필요합니다. 너와 나의 동행을 통해 주님의 동행을 깨닫고 누릴 때, 그 관계를 우리는 교회로, 하나님 나라로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동행하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내가 동행하고자 하는 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으로 내 신앙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혹 잘나가는 사람들, 돈과 명성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고 그들 곁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낮은 곳에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진짜 동행을 찾고 이루어야 합니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 다정하게 품고 격려하며 손을 내밀어 돕는 복음의 동행이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