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 속지 말 것
사도행전 2장 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 2장 43절
기적에 속지 말 것
처음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은 성령 임재로 나타난 몇 가지 결과를 세밀하게 전달합니다. 그중 특이한 것은 두려움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 두렵다는 표현은 경외함을 뜻합니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열성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원한다는 말처럼,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전쟁과 독재의 아픔 속에서 카리스마틱한 지도자를 추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불과 7~8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영웅을 넘어 신적 추앙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의 종교심이 특출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기독교 이단이 유독 한국에서 발흥하여 세계적으로 번성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나 이단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비슷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초대형교회를 일군 목회자가 그 교회 안에서는 신격화 되어 있는 것은 교회 역사를 소중하게 이어가는 것을 넘어 맹목적인 추종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 안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핵심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던 김일성 우상화의 웃픈 이야기처럼, 신격화의 과정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반드시 등장합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로 포장하면서 기적의 주인공을 고양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가히 교회의 메시아 신드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니 기적을 내세우는 이단의 교묘한 속임에 속절없이 낚입니다. 기적과 환상,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정말 신비한 체험입니다. 다만,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그렇게만 나타난다는 생각은 조금 위험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의 결과를 기적으로만 제시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로, 성령을 말씀의 영, 지혜의 영으로 설명하면서 말씀으로 빚어가는 일상을 더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처음 신앙 공동체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 베드로의 설교 이후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공동체로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사도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42). 그런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해주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신비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런 신비함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그냥 이렇게, 짧게 지나갑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행한 사도들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43절의 증언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한 것이 사도들이라는 늬앙스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일하심에 경외심을 가졌다는 게 더 올바른 이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기적이나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다. 기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염두하십시오. 진짜 기적은 내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말이, 내 가치와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 개벽할 사건입니다. 죄인을 의인 삼아 주시는 은혜가 어떤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을 정말 경험하고 싶다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한두 가지 달라질 것을 적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다면, 이 관계 안에서 내가 조금 더 다르게 해야 할 성숙, 그러니까 말과 행동, 선택과 섬김을 실천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일상의 변화가 무엇인지, 기적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