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민감성
4월 15일(화) 사순절 묵상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다]
마태복음 25장 37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태복음 25장 37절
돌봄의 민감성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이 심판대에 설 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심판받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오른 편 사람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 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같은 방식으로 왼 편의 사람들은 어느 때 안 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성도가 책임져야 할 사랑과 섬김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이 보이도록 우리 현실에 나타나시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작은 자입니다. 해서 환대는 어떤 특정한 대상, 특별한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평범하게 해야 할 신앙적 책임이 됩니다.
이소영의 <별것 아닌 선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의 결점을 통해 타인의 빈틈을 알아보고 다정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던 저 순간과 같은, 그런 알아봄의 경험은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 하등 쓸모를 갖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기장 작은 방법이 되어줄 순 있지 않을가 생각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별것 아닌 것들일지 모른다.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다] 중
섬김과 희생을 특별한 일, 대단한 어떤 일로 여길 때 그것은 우리 일상의 범주 바깥이 되고 맙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감히(?) 하기 어려운 일처럼 느끼는 것이지요. 대부분 너무 당연하게,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런 삶이 일상에서 아득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특별하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환대는 언제나 조건이 되고, 섬김은 나중에 기회가 될 때로 미뤄지고 맙니다. 뒷전이 된 일들은 마음에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메마른 다짐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입니다. 결국 무관심, 무신경이 되어가고 어떤 특별한(?) 감동,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나도 그랬지' 하며 씁쓸한 추억으로 곱씹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적당한 감동 정도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 말라갑니다. 딱딱한 가지, 메마른 가시가 되고 맙니다.
해서 실천은 간단하고 쉬워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인류애를 발휘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일상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작은 친절, 작은 배려, 소소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이 나의 친절이 사람입니다. 필요한 혹시 압니까? 그중에 주님이 숨어 계실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