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용기
<거절하는 용기> 10. 8. 2017
갈라디아서 5장 12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고독과 외로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하다. 고독과 외로움. 이 두 가지는 차이가 극명하다. 고독은 자발적 선택이고 외로움은 피동적 선택당함이다. 스스로 홀로 있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람은 타의로 홀로남겨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외로움을 자주 겪는 이들의 가슴에는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댈 존재를 찾는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스스로 베어 버리라
사도는 절교를 바라는가? 공동체 안에서 분리를 말하는가? 아니다. 더 심하다. 사도는 쫓아냄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사도에게서 이런 말이 가능한 까닭은 그들은 몸에 들어온 질병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협이 없다. 몸은 바이러스에 강렬하게 대항한다. 사도가 바라는 것, 권하는 것은 바로 이 저항이다. 복음과 다른 것에는 격렬히 저항하라. 이것은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저렇게 얽힌 인간적인 관계가 본질을 흐리지 않게 해야 한다.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
절교가 쉬운 일인가
분란자들이 사사로운 욕망으로 가만히 들어왔을 때에는 아마도 어떤 관계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아무나 권위를 지닐 수는 없다. 누군가 동조하고 누군가는 거기에 신뢰를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적인 관계들이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잘라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도는 냉철하게 잘라버릴 것을 바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부하라는 뜻이다. 거절하라는 말이다. 여기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고독을 선택하는 용기. 외로움을 선택당하지 말고 고독을 선택하는 용기다.
No 라고 말할 수 있는 결단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다. 아니라고 했다가 다수의 동조에 배척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이게 힘들고 어렵다. 두렵다. 하지만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고독한 일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이 고독이 생명을 살린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노-라고 말하라. 물론 지혜롭게 말하라. 하지만 물러서지 말아라. 웃으며 말하라.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용기를 내라. 주께서 십자가를 이미 지셨으니 성도가 당할 것은 이미 해결된 십자가 밖에 없다.
죄는 선택이다
12절의 방점은 '베어 버리기를'이 아니라 '스스로'다. 죄는 선택이다. 이 말은 100% 맞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은 의와 죄, 이 둘을 반드시 선택하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인간적인 핑계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책임까지도 회피할 수는 없다. 본인이 선택했기에 본인이 책임진다. 죄의 결과는 사망인데, 내가 죄를 선택했다면 내 스스로 죽음에 뛰어든 격이다. 그러니 살겠다는 심정으로 죄를 거절해야 한다. 선택이니까 거절할 수 있다. 용기가 있다면.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였듯, 내가 선택한 십자가가 가능하다.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내가, 내가 스스로 해결할 일이다. 내 믿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진짜 믿음인지 판가름 난다.
거절하는 용기. 그것이 믿음의 결과일 수 있다.
거절의 지혜는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빙빙 돌리다 두리뭉술하게 되어버리면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지혜롭게 하되 다시 손을 잡지 않게 확언해야 한다. 평생 감기를 달고 살 것인가. 병을 키우며 살 것인가. 자잘한 감기, 두통도 평생 가는 것이면 불치병이다.
영혼의 질병에 과감히 거절하라. 믿음의 용기를 내라.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 고독을 선택하되 주와 함께 외로움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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