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보이지 않아도 보는 사람

목사wannabe 2017. 8. 28. 14:13

<보이지 않아도 보는 사람> 26. 7. 2017
갈라디아서 3장 1절

어리석도다 갈리다이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보이는 것에 묶인 인생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옛말처럼, 시력은 언제나 청력을 앞선다. 시력의 압도적인 의존도로 인해서 몸과 마음은 청력은 의심하고 시력은 의지해 왔다. 하지만 강점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약점이다. 시력의 압도적인 의존도로 인해서 시력에 속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그것을 마음에 품고 따라가는 빈곤한 인생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나보다. 보는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인생을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나를 속이는가, 아니면 보이는 것에 내가 속는 것인가. 둘 다 맞겠지만 결론은 하나다. 속는다. 그것에 묶인 삶이 된다. 더 큰 것. 많은 것. 높은 곳. 예쁜 것. 다 보이는 것들의 허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청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시력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청력이다. 엄마 옆에 누워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들음이 아이의 마음 속에서 그려진다. 청력이 시력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런 식의 내면의 전환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든다. 정말 중요한 것은 청력이다. 몸은 시력에 절대의존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몸은 청력을 시력으로 바꾸는 능력으로 시력을 보완한다. 무엇을 보는가도 중요한데, 무엇을 듣는가도 중요하다. 어쩌면 심안, 마음의 눈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인데, 이때 청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들음을 가능하게 하는 화술에 대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여기서 언급할 것은 아니다)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갈라디아 교회는 눈에 보이는 어떤 미혹자들에 의해 그들의 심안, 신안(믿음의 눈)이 가려졌던 것 같다. 흔들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도는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언급한다. 신앙의 정수는 이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며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십자가를 봐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골고다 십자가를 봤다는 말은 없다. 하지만 사도는 자기 고백과 증언에 "눈에 보이는 십자가"를 언급한다. 그가 직접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듣고 보게 되었음은 알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고, 그 길에서 예수와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그 음성 때문에 예수를 보는 자가 되었고, 평생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눈에 보였는가? 지금 보고 있는가? 이 생생한 십자가를..

믿음은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가 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주겠다.” 그는 그 땅이 어딘지 몰랐다. 하지만 그 들은 것을 믿었다. 이 믿음이 그의 시력이 되었다. 요셉은 꿈을 꾸었다. 그는 꿈을 통해 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달랐다. 그 꿈으로 인해 조롱받았고, 팔려갔다. 그러나 결국 그가 품은 시력대로 되었다. 보이지 않아도 보는 자에게 보는 대로 됐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다. 그래서 주님은 봐야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던 것일까.

주님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잘 모르겠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잘 들리는가?

우리 믿음의 현주소가 여기에 달려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보지 못하면서도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

부흥을 보고, 변화를 보고, 성숙을 보고, 성령의 일하심을 보라.

보이지 않는다 핑계하지 말자. 보고 안 보고는 결국 내 믿음에 달렸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듣고 보는 자가 복되다. 보이지 않아도 생생하게 십자가를 보는 것이 믿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 믿음이 인생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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